남과 여 (가제)
감독 이윤기
제작 영화사 봄
주요 등장 인물
그녀 (상민, 37)
그 (지호, 42)
그녀의 남편 (재석, 40)
그의 아내 (문주, 32)
------------------------그녀의 아들 (종화, 9)
그의 딸 (유림, 8)
한국 (등장 순서)
효선 (샾 매니저, 34)
하정 (종화의 개인 교사, 26)
상민의 시댁 식구들
세나 (지호의 옛 친구, 42)
상희 (상민의 언니, 43)
핀란드 (등장 순서)
지호의 동료 (44)
국제 학교 교사 (38)
미치코 (유림의 보모, 29)
택시 기사 (41)
1. 핀란드, 오울루 시내 / 낮 (타이틀 백 몽타쥬)
한산한 슈퍼마켓의 생활 용품 코너.
시선을 한쪽에 고정한 채, 움직임 없이 서있는 상민.
두툼한 코트에 귀를 덮은 털모자, 어그 부츠로 단단히 무장을 하고 있다.
진열대의 구급 약품들을 살피며 고민하다가 하나를 집어 들고 제품 안내문을 보지만,
핀란드어라서 읽지 못하고 난감해하는데...
나른한 70년대 소울 음악이 실내에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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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 직원에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 상민.
영어와 몸짓을 섞어 질문을 하지만, 직원은 못알아듣는 듯 핀란드어로 뭐라 말하고는 다른
직원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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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인테리어 공사 현장.
안전모를 쓴 지호, 동료들과 현장을 돌아다니며 점검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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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산대 앞의 상민, 액정 화면에 찍히는 숫자를 보며 지갑을 꺼낸다.
상민/ (영어) 담배도 한 갑 주세요.
직원/ (핀란드어) 어떤 걸로?
상민/ (담배들을 훑어보다가) ...럭키 스트라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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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마켓 앞 거리.
오랜 동안 내린 눈으로 하얗게 뒤덮인, 차갑고 낯선 풍경.
낮 시간이지만 마치 새벽 무렵처럼 어스름한 빛의 하늘.
쇼핑 봉투를 들고 슈퍼를 나서는 상민, 조심스럽게 눈을 밟으며 걸어간다.
맞은 편 길가에 멈춰 서는 자주색 SUV.
지호, 동료와 차에서 내려 카페테리아로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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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테리아.
식판을 들고 사람들 뒤로 줄을 서있는 지호와 동료.
동료/ (보드판을 보며)(영어) 오늘의 런치 메뉴가... 또 비프 스튜네. 에이...
지호/ (영어) 난 괜찮은데. 여기 스튜.
동료/ (영어) 한국 음식 생각, 많이 나지 않나?
지호/ (영어) 별로... 집에서 자주 먹으니까.
동료/ (영어) 그래? 여기선 쉽지 않을 텐데.
지호/ (영어) 인터넷으로 재료를 주문할 수 있어. 와이프가 가끔 헬싱키에 갔다 올 때
사오기도 하고.
음식을 담아주는 직원이 안면이 있는 듯 두 사람에게 웃으며 인사한다.
지호, 핀란드어로 음식 주문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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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를 달리는 지호의 차.
조수석의 동료가 계속 이야기를 하고 있다.
동료/ (영어) 아직도 고민 중?
지호/ (끄덕이며) .....
동료/ (영어) 하긴. 여기 사는 게 좀 답답하긴 하지... 일년이나 있었으면.
지호/ (영어) 아니. 그런 건 아냐. 나도, 우리 가족들한테도 여기가 괜찮아.
동료/ (영어) 그럼 잘된 거네. 지사장이랑 한국 쪽하고도 다 얘기가 됐다는데.
이참에 계약 연장 조건으로 연봉이나 쎄게 달라고 하든가.
그때, 창밖으로 거리에 서서 쇼윈도우를 보고 있는 상민의 모습이 스쳐지나가자 무심코
룸 미러를 보는 지호.
동료/ (핀란드어) 어, 조심, 조심!!
지호, 브레이크를 급히 밟는다.
눈길에 미끄러지며 멈춰 서는 차.
큰 개를 데리고 길을 건너던 노인이 차 앞에 서서 지호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당황하며 멋쩍은 표정을 짓는 지호.
그 거리의 다른 쪽, 로컬 의류 브랜드 샾 앞에 서있던 상민이 개가 짖는 소리에 지호의
차 쪽을 잠시 돌아보았다가 다시 시선을 쇼윈도우로 돌린다.
추운 바람에 뺨이 발그스레해진 상민, 한 손에 담배를 든 채 휴대폰 카메라로 쇼윈도우의
상품을 찍기 시작한다.
몇 장의 사진을 찍은 후, 시계를 보고는 길가로 나와 지나가는 택시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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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오울루, 국제 학교 / 낮
복도에 서서 교실 안을 바라보는 상민.
마치 가정집 주방처럼 꾸며진 공간에서 담당 교사로부터 개인 상담을 받고 있는 종화.
상민의 표정에 안도와 근심이 교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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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도 창가에 기대어 서서 교사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 상민.
상민/ (영어) 다른 건 서울에서보다 다 괜찮은데... 잠이 좀 많아진 거 같아요.
밤이 길어서 그런가, 너무 많이 자요.
교사/ (영어) 여기선 다들 겪는 거니까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아요. 어른들도 그런데 아이들
이야 당연히 더 그렇겠죠. 어쨌든 잠을 잘 잔다는 건 애들한테 좋은 거예요. 그리고,
또... 다른 특별한 일은?
상민/ (영어) 아니요. 없어요. 너무 없어서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교사/ (영어) 그래서... 불안해요?
상민/ (영어) 예.
교사/ (영어) 엄마가 불안해하는 것은 아이도 느껴요. 그런 감정을 보여주면 안돼요.
(프린트를 건네며) 이거, 캠프 준비물.
상민/ (준비물 리스트를 보다가)(영어) 모르겠어요... 애 혼자 여길 보내는 게 맞는 건지.
교사/ (영어) 혼자라뇨? 우리 교사들하고 학생들이 다 함께 가는데.
상민/ (영어) 며칠씩 저랑 떨어져 본 적이 한번도 없었으니까요.
교사/ (영어) 처음엔 다 그렇죠. 그래도 익숙해져야되요. 지금 종화에겐 특별한 치료법이
없다는 거 아시죠?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낯선 환경에서 스스로 적응하는 능력을
키우고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제일 먼저 할일이에요.
상민/
.....
교실 안쪽의 종화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상민.
3. 오울루, 건축 사무실 / 낮
지호, 사무실 책상에 앉아 직원들과 설계 도면과 모형을 보며 이야기를 하고 있다.
손목 시계의 알람이 조그맣게 울린다.
지호/ (직원들에게, 영어) 잠깐 쉬고 하죠?
직원들이 하나 둘씩 사무실을 나가고, 휴대폰으로 전화를 하는 지호.
지호/ (영어) 미치코? (사이) 지금 어디에요?
4. 오울루, 국제 학교 앞 / 낮
유림의 손을 잡고 학교 입구를 나서는 미치코(일본인 보모), 지호와 통화를 하고 있다.
미치코/ (영어) 상담 끝나고 지금 집으로 가요. (사이) 예...
미치코, 전화를 끊고 유림의 손에 장갑을 끼워준다.
미치코/ (혼잣말, 일본어) 니네 아빠가 날 못 믿나봐.
입구에 서있던 상민, 두 사람을 보고 있다가 시선이 마주 치자 살짝 웃어보인다.
미치코, 고개를 꾸벅 숙여 상민에게 인사하고 유림과 함께 자리를 떠난다.
두 사람이 멀어지는 모습을 보고 있던 상민, 인기척에 돌아보면 종화가 담당 교사와 함께
나오고 있다.
상민/ (활짝 웃으며) 야아, 우리 미남 아들이다...
상민이 종화에게 다가가 품에 안는데, 종화는 조그맣게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다.
교사/ (영어) 저기, 궁금해서요... 종화가 늘 부르는 이 노래가 뭐죠?
상민/ (영어) TV에서 나오는 광고예요.
교사/ (영어)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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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앞 길을 걸어가는 상민과 종화.
종화/ (노래) 앞뒤가 똑같은 전화번호, 앞뒤가 똑같은 전화번호, 1577, 1577, 대리운전
1577...
시선을 아래로 떨군 채 노래를 반복하는 종화.
그 모습을 보며 걷던 상민, 갑자기 눈이 쌓인 화단으로 달려가서 눈을 뭉친다.
상민/ 우리, 눈싸움하자.
상민, 마치 어린 아이처럼 눈을 열심히 뭉쳐서 종화를 향해 던지는데...
걸어가던 종화의 등에 퍽, 하고 맞는다.
눈을 맞은 종화,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움직임이 없다.
상민, 의아한 표정으로 종화에게 다가간다.
상민/ (표정을 살피며) 왜 그래... 아팠어?
상민, 종화의 옷에 묻은 눈을 털어주는데 느닷없이 상민의 머리를 주먹으로 내리치는 종화.
머리가 뒤로 제껴질 정도로 세게 맞은 상민, 바닥에 주저앉는다.
상민/ (아픔을 꾹 참으며) 그냥... 장난친 건데. 엄마가... 미안해.
종화/ 엄마가 미안해. 엄마가 미안해.
상민/ 응. 정말 미안해.
종화/ (다시 걸어가며) 앞뒤가 똑같은 전화번호, 앞뒤가 똑같은 전화번호...
일어서서 종화의 뒤를 천천히 따라가는 상민.
5. 오울루, 지호의 아파트 / 밤
아파트 거실로 들어서는 지호.
TV를 틀어놓은 채 미치코가 소파에서 자고 있다.
방문을 열고 유림이 자는 모습을 확인한 지호, 미치코를 살짝 흔들어 깨운다.
부스스하게 일어서는 미치코, 시계를 보고는 코트를 찾아 입는다.
휴대폰 벨소리.
지호/ (번호 확인하고 받으며) 응.
문주/ (E) 잤어요?
지호/ 아니. 지금 막 집에 들어왔어.
문주/ (E) 미치코는?
지호/ 이제 가. (현관을 나가는 미치코에게 손을 흔들고 다시 전화에) 뭐해?
문주/ (E) 호텔 옆에 인터넷 카페. 찾아볼 게 있어서.
지호/ (한숨) 오늘 돌아온다고 하지 않았어? 유림이 상담하는 날이었는데,
같이 갔어야지.
문주/ (E) 그럴려구 했는데... 온 김에 더 돌아볼까 해서. 다시 올려면 힘들잖아.
지호/ 헬싱키는 다 봐서 더 이상 볼 것도 없다더니.
문주/ (E) 내일 투르쿠로 갈거야. 거기 좋은 레스토랑들이 꽤 있대.
지호/
.....
문주/ (E) 유림이 좀 바꿔요.
지호/ 지금 자니까 내일 전화해.
문주/ (E) 인사만 할래. 잠깐만 깨워줘.
지호, 마지못해 휴대폰을 들고 유림의 방으로 들어간다.
유림을 흔들어 깨운 지호, 휴대폰을 화상 모드로 바꿔 유림의 손에 쥐어준다.
문주/ (E) 유림아.
유림/ (누운 채로 액정화면을 물끄러미 보며) .....
문주/ (E) 선생님하고 얘기 잘했지?
유림/ (표정 없이 고개만 끄덕이고) .....
문주/ (E) 예쁜 선물 사가지고 갈게. 잘 지내고 있어, 응?
지호, 유림의 작은 어깨를 내려다본다.
6. 오울루, 상민의 레지던트 하우스 / 밤
욕실. 수건을 머리에 두르고 양치질을 하고 있는 상민.
갑자기 생각난 듯, 거실로 나와 휴대폰으로 서울 시간을 확인하곤 전화를 한다.
상민/ 응. 나야... 환자 보나봐. 전화 꺼져있네... 그냥 했어. 음... 종화도 잘있구. 여기가 잘
맞는 거 같애. 조용하고 깨끗하고... 공기도 맑고. 밤이 길어서 아직도 좀 이상하지만.
(할 말이 더 없는 듯) 암튼, 또 전화할게.
전화를 끊고 잠시 멍하게 앉아있는 상민. 다시 욕실로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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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방안.
자고 있는 종화의 곁에 눕는 상민, 손을 뻗어 종화를 살짝 끌어안는다.
짜증 섞인 신음 소리를 내며 뒤척이는 종화.
상민, 조심스럽게 손을 떼고는 종화의 잠든 얼굴을 물끄러미 본다.
종화의 목덜미 쪽엔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가 불그스름하게 남아있다.
협탁 위의 구급약 상자에서 연고를 꺼내 조심스럽게 발라주는 상민.
창밖에 눈이 내리고 있다.
7. 오울루, 국제 학교 부근 도로 / 아침
아침이지만 아직 어둠이 짙게 깔려있는 도로.
조수석에 유림을 태우고 운전하고 있는 지호.
유림, 창밖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이 없다.
그런 유림을 흘깃 보는 지호.
학교 건물이 보이고, 앞서 가던 통학 버스가 멈춰 서자 지호의 차도 그 뒤에 정차한다.
버스에서 내리는 사람들 틈에 상민과 종화의 모습이 보인다.
8. 오울루, 국제 학교 앞 주차장 / 아침
상민, 종화의 앞에 쪼그리고 앉아 손을 잡고 이야기를 하고 있다.
상민/ 갔다 온 애들이 그러는데 캠프장이 정말 좋대. 재미있을 거야. 너무 재밌어서 우리
종화가 안돌아올까봐 난 걱정이야.
멀리 대기해 있는 버스 앞에서 종화를 부르는 교사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종화가 돌아서서 가려는데 다시 팔을 잡고 품에 안는 상민, 마치 영영 헤어질 것처럼 꼭
끌어안고 한동안 놓지 않는다.
상민/ 사랑해. 알지? 엄마가 많이 사랑하는 거...
상민이 다시 품에서 놓아주자, 뒤도 안보고 걸어가는 종화.
한동안 바라보고 서있던 상민, 교사를 따라 버스에 오르는 종화의 모습을 확인하고 돌아서
서 걸어가다가 갑자기 멈춰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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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 앞에 서서 교사와 이야기하고 있는 상민.
교사/ (난감한 표정)(영어) 안됩니다. 우리 방침을 지켜주셔야죠.
상민/ (영어) 버스만 같이 타고 간다는 거예요. 캠프에 가서... 그냥 멀리서 보기만 할게요.
멀리서... 방해 안하구요.
교사/ (영어) 부모가 같이 가면 이 캠프는 아무 의미가 없어요. 저희를 믿고 맡겨주셔야...
상민/ (영어) 정말 방해 안한다니까요. 제 아이는... 제가 없으면 안되요. 다칠지도 모르구요.
교사/ (단호하게)(영어) 정 그러시면, 여기서 아이를 데리고 돌아가세요.
상민/
... 예?
교사/ (영어) 미안하지만 아이도 캠프에 갈 수 없다구요.
상민/
.....
교사/ (영어) 잘 생각해보세요. 이 먼 곳까지 오신 이유를. 아이한테 새로운 기회를 주시려
던 거 아니었어요?
잔뜩 격앙된 표정의 상민.
주위에 학부형들 몇몇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상민을 바라보고 있고, 그들 뒤편에는 지호가
멀찌감치 서서 지켜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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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을 태운 버스가 떠나고, 학부형들도 하나 둘씩 빠져나가며 텅비어가는 주차장.
망연자실 서있던 상민, 안절부절 하다가 가방에서 담배를 꺼내는데 라이터를 찾을 수 없다.
주위를 둘러보는 상민, 차 앞에 서있던 지호에게 다가간다.
상민/ (영어) 저, 불 좀 빌릴 수 있어요?
지호, 차문을 열고 시가라이터를 뽑아서 나온다.
담배에 불을 붙이고 피우는 상민.
상민/ (영어) 감사합니다.
지호/ 한국분이시죠?
상민/
...예.
상민, 무심하게 답하고는 도로 쪽으로 무작정 걸어간다.
상민/ (돌아서서 다짜고짜) 캠프장이 여기서 멀어요?
지호/ 쿠사모 근처니까... 아마 한 세시간 정도.
상민/ (도로 쪽을 바라보며) .....
그런 상민을 보는 지호.
9. 교외 도로 / 아침
한적한 도로를 달리는 지호의 차.
조수석에 앉아 한동안 창밖을 응시하던 상민, 운전하고 있는 지호를 돌아본다.
지호/ (시선을 의식하고) 예?
상민/ 정말 괜찮으신 거죠?
지호/ (피식 웃으며) 이번이 세 번째예요. 예에, 괜찮다구요.
상민/ 아... 어쨌든...
지호/ (장난스럽게) 네, 고맙다는 말도 아까 했습니다.
상민/
.....
지호, 뭔가 이야기를 하려다가 상민의 굳은 표정을 보고 그만 둔다.
어색한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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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불구불한 산길. 사방이 눈으로 덮여 온통 하얗다.
말없이 각자의 시선으로 창밖을 보고 있는 두 사람.
약간 안정을 찾은 듯한 상민, 네비게이션을 들여다본다.
상민/ 지금 맞게 가고 있는 거예요?
지호/ (능청스러운 투) 음... 아마 그럴걸요.
상민/ (왠지 못미더운) .....
지호/ (그런 상민의 표정을 보고 웃으며) 그 쪽은 전에도 가본 일이 있어서 길 잃어버릴 일
없어요. 쿠사모란 데가 북쪽이거든요. 저기, 빛 보이죠?
상민, 지호가 가리키는 쪽을 보면 멀리 산너머 하늘에 푸른 빛이 신비롭게 퍼져있다.
지호/ 북극에서 오는 빛이에요. 저걸 따라가면 되요.
순간 기묘한 느낌을 받은 상민, 시선을 고정하고 말이 없어진다.
눈 덮인 산기슭의 도로를 달려가는 지호의 차. 마치 빛을 향해 달려가는 것처럼 보인다.
10. 쿠사모 부근, 캠프장 / 낮
조수석에서 잠들어 있던 상민이 깨어난다.
주위를 둘러보면, 차는 한적한 곳에 멈춰 서있고 운전석도 비어있다.
차문을 열고 나오는 상민, 주위를 둘러보는데 숲 사이로 호수가 보여 그쪽으로 걸어간다.
호숫가에 지호가 앉아서 손으로 물을 떠서 마시고 있다.
인기척에 뒤를 돌아보는 지호, 상민이 다가가자 일어선다.
지호/ (호수 반대편을 가리키며) 저-기.
상민이 보면, 캠프장에 도착해서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의 무리가 있다.
벌써 불도 피웠는지 통나무 집들 굴뚝에서는 하얀 연기가 무럭무럭 피어오르고 있고,
아이들의 웃음 소리도 간간히 울려온다.
그리고, 정겨운 새소리와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
지호/ 경치가 좋-네요.
상민/ (캠프 쪽에 시선을 둔 채 고개를 끄덕이며) .....
지호/ 우리 애는 이번 캠프가 두 번째인데, 난 처음 와봐요. (주위를 둘러보며) 좋다...
상민, 괜히 눈시울이 젖어온다.
지호/ (상민을 돌아보며) 건너가 볼까요?
멋쩍은 듯이 헛기침을 해보는 상민, 이제야 주위 경관을 천천히 둘러본다.
상민/ 그만 돌아가죠.
지호/ 예?
상민/ (뒤돌아서 걸어가며) 돌아가자구요.
지호/
... 괜찮겠어요?
상민/ 봤으니까, 됐어요.
상민, 앞서서 차 쪽으로 걸어가고 지호가 잠시 그녀의 뒷모습을 보다가 따라간다.
11. 쿠사모 부근, 주유소 / 낮
어느덧 조금씩 눈발이 날리고 있다.
주유소에 딸린 편의점 카운터에서 커피를 사고 있는 상민.
창밖을 보면, 지호가 바닥에 엎드려 열심히 타이어에 체인을 장착하고 있다.
Cut to
지호, 주유소 직원과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웃고 있는데 상민이 다가와 커피를 건넨다.
지호/ 어, 고마워요. (받아서 한모금 마시다가 상민을 보고) 하나만 샀어요?
상민/ 전 커피 안마셔요. 위가 좀 안좋아서.
지호/ 아...
상민/ 근데 여기 먹을 게 별로 없어요. 차가운 샌드위치밖에.
지호/ 괜찮아요. 커피면 됐지...
상민/ 뭐든 따뜻한 걸 드셔야 하지 않을까...
지호/ 그러고 싶긴 한데 우리, 빨리 출발해야 될 거 같아요. 아까 저 직원한테 들으니까
오늘 눈이 장난 아니게 올 거라네. 타세요. (운전석 문을 여는데)
상민/ 근처 레스토랑에서, 잠깐 식사하고 가면 어때요?
지호/
... 배고파요?
상민/ 솔직히 좀, 그래요.
지호/ (눈 내리는 하늘을 보며 고민하는) .....
상민/ 제가 살게요. 여기까지 태워주셨으니까... 사드리고 싶어요.
12. 쿠사모 부근, 레스토랑 / 낮
한적한 도로변에 있는 소박한 식당.
말없이 식사를 하고 있는 두 사람.
상민은 파스타를, 지호는 스튜와 빵을 먹고 있다.
상민/ (열심히 먹는 지호를 보다가) 맛있어요?
지호/ 그런대로, 먹을 만해요.
상민/ 다행이네...
지호/ (상민의 접시를 보며) 왜, 음식이 그대로예요. 제 꺼 좀 드실래요?
상민/ 아니요. 원래 이런 거 별로 안좋아해요. 입이 완전 토종이라... 된장, 청국장 같은 거
좋아하거든요. 외국 나오면 핸드백에 고추장도 넣어가지고 다녀요.
지호/ 아... 그럼 여기 계시기 진짜 힘들겠다.
상민/ 예. 힘들어요. 지난 열흘 동안 힘들었는데... 아이가 생각보다 적응을 잘해줘서...
그리고 뭐, 며칠 있으면 돌아가니까 괜찮아요.
지호/ 핀란드의 밤만 보다가 가시겠어요.
상민/ 그러게...
지호/ 여긴 여름이 아주 좋은데. 백야,라고 아실 거예요. 하루종일 낮이어서 불면증에 시달
리기도 하지만... 숲이나 호수가 정말 달력 속의 사진 같죠.
상민/ (잠시 말이 없다가) 일년이나 여기 사셨으면... 아이는, 많이 좋아지던가요?
지호/ 글쎄요.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겉으로는 크게 달라지는 걸 못느끼겠어요. 쉽게 낫는
증상은 아니니까. 의학 용어로 선택적 함구증이란 게... 일종의 우울증세거든요.
상민/ (고개 끄덕이며) ...그렇구나. 난 같은 학교라서 비슷한 줄 알았는데 아니네. 우리 애
는... 그보다 많이 안좋아요.
지호/
.....
상민/ 심한 자폐증이거든요. 애기 때부터. (서글픈 표정으로) 별별 방법을 다 해보다가...
여기까지 왔는데. 막상 오니까, 겨우 3주 있는 동안 뭐가 나아질까 싶은 생각도 들구.
지호/ (상민의 표정을 보다가) 뭐든, 시도해보는 게 중요하죠.
상민/ (애써 밝은 얼굴을 하며) 그렇죠? 뭐든 해야겠죠. 뭐든...
지호/ (달리 할 말이 없어서 시선을 창밖으로 돌리고) 어, 눈이 많이 오네.
창밖으로 굵은 눈이 펑펑 내리고 있다.
13. 교외 도로 / 낮
눈보라가 거세게 몰아치는 도로.
차들이 거의 주차를 한 것처럼 멈춰 서있다.
조수석에 앉아있는 상민의 시선으로, 경찰과 이야기하고 있는 지호가 보인다.
지호, 머리에 묻은 눈을 털며 차로 뛰어온다.
지호/ 산 쪽 도로를 다 통제했다네요.
상민/ 예? 그럼 언제쯤...
지호/ 눈이 그쳐야 제설 작업을 할 수 있어서 기다려봐야 된데요.
상민/ (걱정스럽게) 어쩌지...
지호/ 기차는 다닌다니까 쿠사모 역으로 가면 탈 수 있을 거예요. 가보실래요?
상민/ .....
지호/ (유턴을 하려고 도로를 살피며) 가봅시다.
상민/ 저만 기차를 타면, 혼자 여기서 기다리시려구요?
지호/ 그래야죠. 여기선 뭐, 흔히 있는 일이에요. 저 사람들 봐요. 당황하지도 않아요.
상민/ (고민하는) .....
지호/ (상민 표정을 보고) 왜요?
14. 쿠사모 부근, 레스토랑 / 저녁 무렵에서 밤까지
(#12의) 레스토랑으로 다시 되돌아온 두 사람.
웨이트리스가 테이블로 온다.
웨이트리스/ (핀란드어) 다시 오셨네요.
지호/ (괜히 멋쩍어서 웃어 보이는데) .....
웨이트리스/ (핀란드어) 괜찮아요. 여기 계신 분들 모두 가다가 되돌아온 분들이에요.
지호/ 아...
웨이트리스, 메뉴를 주고 돌아간다.
지호/ 다시 만나서 반갑다네요. 저 손님들 다 우리랑 같은 처지라면서...
상민, 씁쓸하게 웃는다.
지호/ 뭐 드실래요?
상민/ 음... 따뜻한 우유.
지호/ 그럼 난 따뜻한 커피. (웨이트리스에게 손짓하며) 그런데, 정말 기차 안타실거예요?
상민/ 괜찮다니까요. 지금 세 번째 물어보는 거예요.
지호/
.....
상민/ 어차피 아이들 캠프도 이 근처니까...
지호/ 여차하면 데리러 갈려구요?
상민/ 아마도.
지호/ 내 생각엔, 애들이 우리보다 더 잘 있을 거 같은데요.
상민/ .....
지호/ (웨이트리스가 다가오자)(영어) 따뜻한 우유하고 커피... 아, 그리고 민뚜 한잔.
상민/ 민...뚜?
지호/ 핀란드 사람들 먹는 술이에요. 눈도 오니까... 딱 한잔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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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흐르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 두 사람.
지호/ 원래 일 때문에 여기 온 거지만, 막상 지내다보니 아이를 위해서도 잘왔다는 생각이
들어요. 음... 얘네들 교육 스타일이랄까, 믿음이 가는 게 있어요. 제일 좋은 점은,
아이들을 경쟁시키지 않는다는 거. 성적표에 등수가 없어요. 당연히 우열반도 없고
특수 학교 란 것도 없죠. 장애가 있는 아이들도 일반 아이들과 같이 교육을 받는 대
신, 적응을 못하거나 뒤처지는 아이들을 챙겨주는 교사들이 따로 있어서 아이들 각각
의 특성에 맞춘 교육을 해주거든요.
상민/ (열심히 듣는) .....
지호/ 한마디로 인재를 만드는 거 보다는 낙오자를 만들지 않는다,가 얘들 교육의 모토라고
하더라구요.
상민/ 낙오자를 만들지 않는다... (한숨) 말만 들어도 좋네요. (벽시계를 흘깃 본다)
지호/
.....
상민/ (지호가 말이 없어지자) 아. 전엔 안그랬는데 여기 와서 시계를 자꾸 보는 버릇이
생겼어요. 도대체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 시간 개념이 없구...
지호/ 알죠. 저도 겪어봐서.
상민/ 며칠 그러다보니까... 시간이란 게 무의미해지고, 아이가 깨면 아침이구나, 배고프다면
저녁 먹을 때가 됐나, 뭐 그런 식으로 살고 있더라구요. 마치 원시인이 된 기분.
지호/ 원시인이요?
상민/ 예. 원시인. (지호 앞에 놓인 술잔을 가져오며) 민뚜, 맛있어요?
지호/ 좀 독한데... 나름 산뜻해요.
상민, 한모금 마셔보고는 살짝 얼굴을 찡그린다.
지호/ ...이상한가?
상민/ 향은 좋네요. (웨이트리스에게 손짓으로 한잔을 더 주문하고는) 눈도 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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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 말없이 창밖의 눈 내리는 풍경을 바라본다.
노란 가로등들이 비추는 거리가 기묘하고, 쓸쓸하다.
웨이트리스가 계산서를 들고 다가온다.
웨이트리스/ (핀란드어) 미안합니다. 저희 지금 문 닫을 시간이에요.
지호/ (지갑을 꺼내며 상민에게) 여기, 끝났다는데요.
상민/
... 벌써요? (급히 카드를 꺼내 먼저 내민다)
웨이트리스/ (상민의 카드를 받으며) (핀란드어) 혹시 호텔 필요하세요?
지호/ (핀란드어) 숙소... 글쎄요.
지호, 어쩌나 하는 표정으로 상민을 바라본다.
15. 호텔, 로비 / 밤
카운터의 직원이 컴퓨터로 예약을 확인하고 있다.
직원/ (영어) 침대 두 개 있는 방이죠?
지호/ (영어) 아니요. 방 두 개...
직원, 두 사람을 흘끔 보고는 다시 빈 방을 확인한다.
상민과 지호가 각자 신용카드를 건네고, 직원이 열쇠 두 개를 내민다.
16. 호텔, 복도 / 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어두운 복도를 걸어가는 두 사람. 왠지 어색하다.
상민/ (방 번호를 확인하고) 여기.
멈춰 서는 두 사람. 그 사이에 흐르는, 짧지만 미묘한 느낌.
지호/ 그럼... 잘 쉬시고.
상민/ 예.
상민이 방으로 들어가고 혼자 복도에 남겨진 지호.
잠시 머뭇거리다가 자신의 방 쪽으로 걸어간다.
17. 지호의 호텔 방 / 밤
침대 맡에 걸터앉아있는 지호.
리모콘으로 TV를 켠다.
잠시 뉴스 화면을 보다가 꺼버린다.
그대로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듯 눈을 감는다.
잠시 후, 다시 눈을 뜨고 천정을 바라본 채 생각에 잠긴다.
18. 상민의 호텔 방 / 밤
샤워를 하고 있는 상민.
무슨 소리가 들린 것 같아 물을 잠그고 귀를 기울인다.
샤워 커튼 사이로 고개를 내밀어보지만 아무런 인기척이 없다.
다시 물을 틀고 샤워를 계속하는 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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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가 젖은 채 가운을 입고 침대에 모로 누워있는 상민.
벽에 걸린 큰 거울에 자신의 모습이 비춰져있다.
창 쪽에서 바람 소리가 새어 들어온다.
19. 호텔 앞 / 새벽
호텔에서 나오는 상민.
인적이 전혀 없고 어스름한 정원. 지난 밤과는 달리 조용히 눈이 내리고 있다.
정원의 건너편엔 나무들이 빼곡히 모인 숲이 보인다.
휴대폰을 꺼내 한국 시간을 보고는 전화를 할까 하지만 수신이 잘 잡히지 않는다.
휴대폰을 다시 집어넣고 담배를 꺼내 성냥으로 불을 붙여 피우는 상민.
표정이 그 어느 때보다 평온해 보인다.
지호/ 벌써 일어났어요?
상민이 돌아보면 지호가 현관 쪽에서 다가온다.
상민/ 예... 그냥 눈이 떠졌어요. 바람 소리가 멈추니까 너무 조용해서.
지호/ (고개 끄덕이며) 너무 조용해서 깼다...
상민/ 늘 애가 옆에 있다가 없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네.
두 사람, 나란히 서서 정원 쪽을 바라본다.
상민/ (지호를 보며) 근데 왜 이렇게 일찍...?
지호/ 그냥 좀. 근처를 걸어볼까 싶어서요. 같이 가실래요?
20. 숲 / 새벽
숲 사이의 산책로를 천천히 걸어가는 두 사람.
주위가 고요해서 걸을 때마다 뽀드득, 뽀드득, 눈 밟는 소리만이 크게 들린다.
멈춰 서는 상민. 걸어온 길을 돌아본다.
하늘 높이 솟은 침엽수들 사이로, 그들이 지나온 길이 하얀 양탄자처럼 길게 뻗어있다.
마치 하얀 세상에 자신만이 내던져진 것 같은 느낌.
지호, 몇 발자국 지나쳤다가 상민을 돌아본다.
상민/ 봐봐요. 발자국들이 다 없어졌어...
길 양쪽을 번갈아 보는 지호.
지호/ 많이 온 거 같은데, 슬슬 돌아갈까요?
상민, 대꾸 없이 돌아서서 다시 가던 길로 계속 걸어간다.
그녀를 바라보던 지호, 뒤를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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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앞서 걸어가는 상민, 거리를 두고 따라가는 지호.
사뿐히 내리는 눈이 두 사람의 머리와 어깨에 쌓여가고 있다.
상민/ (돌아보며) 힘들어요?
지호/ 신발이 구두라서 좀...
상민/ 난 괜찮은데. 많이 걷는 편이거든요. 저 일하는 샾이 남산 쪽이어서 언덕길을 매일
오르락내리락해요. 하야트에서 경리단 가는 길.
지호/ 아... 무슨 샾인데요?
상민/ 그냥 뭐... (말을 흐린다)
상민이 다시 멈춰 선다.
지호를 돌아보며 손으로 숲속을 가리킨다.
숲 사이로 보이는, 통나무로 지은 작은 집들.
상민, 방향을 바꿔 숲 속으로 들어가는데 지호가 말릴까, 하다가 그만 두고 따라간다.
몇 발자국 가던 상민이 깊은 눈구덩이에 한 쪽 발이 푹, 빠지며 엉덩방아를 찧는다.
지호, 당황하는 상민을 보고 웃으며 다가가 상민의 팔을 잡고 구덩이에서 빼내준다.
민망한 표정으로 일어서는 상민.
지호가 허리를 숙여 상민의 바지에 묻은 눈을 털어준다.
상민, 그런 지호를 물끄러미 내려다본다.
지호가 몸을 일으키자, 두 사람이 서로 가깝게 마주 보게 된다.
잠시 상민의 얼굴을 바라보는 지호.
상민의 속눈썹에도 눈이 하얗게 쌓여있어서, 낯설고 신비롭게 보인다.
지호/ 눈썹에까지 쌓이네...
지호가 손을 얼굴로 가까이 가져가자 움찔, 하는 상민.
손가락으로 상민의 눈썹 위 눈을 살짝 훑어 내리는 지호.
체온에 눈이 녹으며 상민의 뺨을 타고내리는 물 한줄기가... 마치 눈물처럼 보인다.
그런 상민의 얼굴을 바라보는 지호.
순간 멋쩍어진 상민, 지호의 머리를 가리킨다.
지호/
...?
상민/ 완전 할아버지 같아요. 머리 허연 할아버지.
지호, 풋 하고 웃는다.
21. 통나무 집 / 아침에서 낮까지
텅 빈 집 안으로 들어온 두 사람.
어두운 실내를 천천히 둘러본다.
한가운데에 커다란 장작 난로가 있고 벽 쪽으로는 긴 의자와 침상, 모포 등이 놓여있다.
지호/ 이거, 사우나였네.
상민/
... 막 들어와도 괜찮아요?
지호/ 글쎄요. (난로를 만져보며) 누군가 다녀간지 얼마 안됐어요. 아직 온기가 있어.
성냥 좀 줘봐요.
상민이 성냥을 건네고, 지호가 장작에 불을 붙인다.
그 모습을 잠시 보던 상민, 창가로 가서 의자에 앉는다.
상민/ 우리 지금, 불량 고등학생들 같아. 주인도 없는 집에...
지호/ (웃으며) 불량 고등학생... 그러게요. 정말 그러네.
상민, 창밖을 보면 눈 내리는 숲이 보인다.
상민/ (머리를 벽에 기대며) 따뜻해서 좋다... 이런 숲속에 사우나라니.
지호/ 얘네들, 사우나 정말 좋아하잖아요. 돈 벌면 집보다 사우나를 먼저 만든다니까.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핀란드 여자들은 사우나에서 아이를 낳았데요. 오죽하면
사우나 안에 사는 요정도 있다는 전설이...
한참 사우나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지호, 상민이 대꾸가 없어서 돌아본다.
창가에 기댄 채 눈을 감고 있는 상민, 잠이 든 것처럼 보인다.
곁으로 다가가 나란히 앉는 지호, 잠시 상민의 얼굴을 바라본다.
그녀의 눈가에 - 마치 눈물처럼 -물이 맺혀있다.
천천히 입을 맞추는 지호.
상민이 살짝 눈을 뜨고 지호를 바라본다.
상민/ 저기... 무슨 얘기 하고 있었죠?
지호/ (살짝 당황) 사우나에... 요정이 산다는...
상민, 말하고 있는 지호에게 키스한다.
조심스럽게 서로의 입술을 찾던 두 사람, 조금씩 더 격렬해진다.
지호, 상민을 들어서 안고 침상으로 간다.
상민을 침상에 눕힌 지호, 코트 단추를 풀며 다시 키스 한다.
상민/ (키스를 받아들이며) ... 요정이... 요정이 사우나에 산다구요?
옷이 벗겨지며 닿는 지호의 손길에 상민의 몸이 조금씩 떨린다.
급하게 그녀의 안으로 들어가는 지호.
순간 거친 숨소리와 함께 일그러지는 상민의 표정.
지호/ (잠시 멈추고) 아파요?
상민/ 아니... 예. 조금. (지호의 머리를 만지며) 괜찮아요.
지호, 다시 몸을 움직이기 시작한다.
점점 가빠지는 두 사람의 숨소리.
그러다가 어느 순간, 조용해진다.
지호가 행위를 멈추고 보면, 상민이 창밖을 무표정하게 응시하고 있다.
그 표정을 잠시 보다가 상민의 몸에서 물러나 앉는 지호.
옆으로 돌아눕는 상민. 지호가 손을 뻗어 상민의 머리를 어루만진다.
상민, 지호의 손을 잡아 자신의 얼굴에 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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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란히 누워있는 두 사람. 지호가 상민을 등 뒤에서 안고 있다.
상민/ 아까, 방에서 눈을 뜨고 보니까... 아이가 옆에 없잖아요. 근데... 걔가 곁에 없으면
정말 큰일이 날 거 같았는데... 이상하게 맘이 편한 거야. 아, 이런 적이 없었구나...
싶었고.
지호/
.....
상민/ (눈물이 맺히며) 괜히 미안해져서... 나 자신한테 핑계를 댔어. 여기까지 왔으니까.
아이를 위해서 이 먼 나라까지 왔으니까. 난 할 일을 한 거야...
지호, 상민의 어깨를 감싸 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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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에서 깨는 상민, 고개를 돌려보면 지호가 난롯불을 살펴보고 있다.
상민/ (창밖을 보며) 지금... 밤이에요?
지호/ 아니요. (손목시계를 보고) 낮 12시도 안됐는데.
상민/ (돌아누우며) 흠....
지호/
.....
상민/ 여긴... 정말 현실 같지가 않아.
일어서서 코트를 입는 지호.
지호/ 불이 약해서, 나무 좀 구해올게요.
지호, 대꾸 없는 상민의 뒷모습을 잠시 보곤 밖으로 나간다.
혼자 남겨진 상민, 몸을 일으켜 앉는다.
창밖으로, 눈 내리는 숲속으로 걸어가는 지호의 모습이 조그맣게 보이다가 사라진다.
22. 숲 / 낮
코트를 걸쳐 입으며 뛰어나오는 상민, 급히 주위를 둘러본다.
사방이 똑같아 보여서 지호가 걸어간 방향을 알 수가 없다.
무작정 숲 한 쪽 방향으로 걸어가는 상민.
상민/ 어딨어요?
하지만,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아 당황하는 상민.
그때 무슨 소리가 들려 뒤를 돌아보는데...
내리는 눈 사이로 검은 형체의 실루엣.
십 여미터 전방에 거대한 곰이 상민을 바라보고 있다.
입을 다물지 못한 채 굳은 듯이 서있는 상민.
한동안 상민을 바라보던 곰, 숲속으로 유유히 사라진다.
곰이 사라진 뒤에도 움직이지 못하는 상민.
지호가 다가와 어깨를 건드리자 소스라치게 놀란다.
지호/ 왜 이렇게 놀래요?
상민/ (멍한 표정으로) 그게...
지호/ (농담으로) 무슨, 곰이라도 본 사람처럼...
순간, 탕! 하고 메아리치는 날카로운 총소리.
놀라는 표정의 두 사람.
잠시 후, 시베리안 허스키들이 끄는 썰매가 숲 길을 가로 질러 달려와 두 사람 앞에 멈춰
선다. 썰매 뒤에는 총을 든 중년의 핀란드 남자가 타고 있다.
남자/ (영어) 괜찮아요?
지호/ ... ?
남자/ (영어) 여기서 연기가 나길래 돌아보려고 나왔는데, 나보다 곰이 먼저 와있더라구요.
지호/ ... (상민을 돌아본다)
Cut to
빠른 속도로 달리는 썰매 뒤에 타고 있는 상민과 지호.
상민/ (영어) 혹시, 그 곰을 죽인 거예요?
남자/ (영어) 아니요. 공포탄이었어요. 가끔 녀석들이 사람들 근처로 먹을 걸 찾으러 내려오
거든요.
상민/ (안도하며) 아...
지호/ (의아한 표정, 혼잣말로) 정말... 정말 현실적이지가 않아...
23. 허스키 농장 / 낮
허스키들을 수십 마리 키우는 농장에 딸린, 고즈넉한 집.
식탁에 앉아있는 상민과 지호, 부인이 차려준 차와 빵을 먹고 있다.
부인/ (영어) 맛이 괜찮아요?
상민/ (영어) 잼의 향이 아주 특이한데, 맛있어요. 차도 그렇고. 무슨 과일이죠?
부인/ (영어) 클라우드 베리라고, 핀란드 북쪽에서만 나는 거죠.
지호/ 클라우드 베리...
부인/ (영어) 여름에 해가 기니까 클라우드 베리가 잘자라요. 베리만 한 오십가지 될걸요.
상민/ 아... 맛있다.
지호, 열심히 먹는 상민을 바라본다.
상민/ (지호의 시선을 느끼고) 배가 많이 고팠나봐...
거실 쪽에서 남자가 들어온다.
남자/ (영어) 관제소 쪽하고 통화했는데, 도로는 이제 괜찮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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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탁에 둘러앉아 차를 마시며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는 상민과 지호, 그리고 친절한 중년 부
부. 어느 덧 창밖엔 눈이 그치고 조금씩 햇살이 비추기 시작한다.
24. 교외 도로 / 저녁 무렵
달리는 지호의 차. 오울루로 돌아가는 길이다.
운전하던 지호, 머리를 시트에 기댄 채 창밖을 향하고 있는 상민을 돌아본다.
지호/ 자요?
상민/ ... 아니요.
지호/ 계속 아무 말 없어서 자는 줄 알았어요.
상민/ 좀 졸리긴 한데... 원래 차만 타면 잘자는데... 깨어있고 싶네요.
지호/
.....
다시 침묵.
멀리 도시의 불빛들이 조금씩 가까워져온다.
25. 오울루, 상민의 레지던트 하우스 앞 / 밤
지호, 상민의 집 앞 길가에 차를 세운다.
뭔가 할 말을 찾듯이 망설이는 두 사람.
상민/ 그럼, 조심해서 가세요.
지호/ 저기...
상민/ (멈칫) .....
지호/ 생각해보니까 우리, 서로 이름도 몰라요.
지호, 아쉬움 가득한 표정으로 상민을 바라본다.
상민, 살짝 웃어 보이고 문을 열려는데 지호가 상민의 어깨에 손을 올린다.
깊은 한숨을 내쉬는 상민, 갑자기 몸을 돌려 지호에게 키스한다.
점점 키스가 격렬해지면서... 지호, 상민의 옷 속으로 손을 넣어 가슴을 만진다.
상민도 지호의 셔츠 뒤로 양손을 넣고 꽉 끌어안는다.
상민/ (귀에 속삭이듯) ...해요. 여기서.
지호, 상민의 얼굴을 바라본다.
상민이 고개를 끄덕이자 지호, 시트를 뒤로 젖히고 상민을 안아서 뒷자리로 넘어간다.
코트도 벗지 않은 채 대충 옷을 풀어헤치고는 상민의 몸 안으로 들어가는 지호.
격렬하게 몸을 움직이는 두 사람.
상민, 행위 중에도 계속 지호의 얼굴을 바라본다.
지호가 괜히 민망해져서 상민을 끌어안으면, 상민이 밀쳐내고 다시 얼굴을 마주 본다.
두 사람의 뜨거운 호흡으로 창에 뿌옇게 김이 서린다.
지호의 숨소리가 조금씩 거칠어지며 사정에 이르려한다.
지호/ (움직임을 잠시 멈추고) 저기, 위험하지 않을까...
상민/ 아니. 그냥 해도 되요.
다시 몸을 움직이는 지호.
두 사람의 거친 숨소리가 한동안 교차하다가... 움직임을 멈추며 사정하는 지호.
잠시 말없이 서로를 끌어안고 있던 두 사람, 뒷자리에 나란히 앉아 각자 옷을 추스른다.
상민이 차문을 여는데, 지호가 상민의 손을 잡는다.
상민, 마치 악수를 하듯 지호의 손을 꽉 쥐어주고는 차에서 내린다.
뒤돌아보지 않고 집 쪽으로 걸어가는 상민.
그녀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보고 있는 지호.
26. 오울루, 지호의 아파트 앞 / 밤
아파트 앞 주차장으로 들어서서 멈춰 서는 지호의 차.
지호, 시동을 끄고 2층을 올려다보면 불이 켜져 있다.
내리지 않고 멍하게 앉아 생각에 잠긴 지호.
차 소리를 듣고 2층 창가로 다가와 밖을 내려다보는 문주.
지호의 차를 보고 잠시 얼굴이 밝아졌다가, 차에 앉아있는 지호를 보고 표정이 다시 굳으며
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27. 오울루, 지호의 아파트 / 밤
지호, 거실로 들어와 보면 문주가 식탁에 앉아 컴퓨터 모니터를 보고 있다.
지호/ 잘갔다왔어?
문주/ 응... 좀 아까 도착해서 전화했었는데. 안받더라.
지호/ (맞은 편에 앉으며) 현장이 좀, 바뻤어.
문주/ 토요일인데 현장엘 갔어?
지호/ ... 문제가 생겨서.
문주/ (모니터를 돌려서 보여주며) 이 사진들 좀 봐봐.
문주, 자신이 찍어온 카페와 레스토랑 사진들을 지호에게 보여준다.
문주/ 이런 스타일 어때요? 어떨 거 같애?
지호/
.....
문주/ 도시마다 느낌이 조금씩 다르긴 다르더라구. 트렌드같은 게 있어. 헬싱키는 뭐랄까,
아무래도 카모메 식당 같은 심플한 패턴이 많고, 투르크는 좀 트래디셔널하고.
일단 샘플링 좀 해서 다음에 가면 부동산 회사랑 상의해볼까 싶어. 소개해줄데 있지?
지호/ ... 너무 서두르는 거 아냐?
문주/ 왜?
지호/ 회사랑 계약 연장을 할지 아직 결정도 안했는데, 일단 그거 먼저 정리하고...
문주/ 결정한 거 아니었어?
지호/ 그렇게 쉽게 결정할 문젠 아니지. 서울 일이랑 유림이 학교... 다 고려해봐야지.
문주/ 유림이 때문에라도 여기 있는 게 좋다고 한 사람이 오빠였잖아. 왜 이제 와서 그래?
내가 여기서 일을 해보겠다는 게... 그렇게 맘에 안드는 거야?
지호/
... 그런 뜻이 아닌 거 알잖아. 나도 여기가 좋아. 그런데, 다른 여건들도 좀 따져보
고 결정했으면 해서 그래.
문주/ (못마땅한 표정) .....
지호, 달래듯이 문주의 손을 잡는다.
지호/ 이 사진 파일들 나한테도 줘. 사무실에서 보고 도움 될 자료 있는지 찾아볼게. 응?
문주/ (마지못해 고개 끄덕) .....
지호/ (일어서며) 유림이는 캠프 잘갔다.
문주/ (모니터를 응시한 채) 응...
그런 문주를 잠시 보다가 욕실로 들어가는 지호.
28. 오울루, 상민의 레지던트 하우스 / 밤
욕실 안.
욕조에 걸터앉아 물을 받고 있는 상민.
셔츠를 벗어서 빨래통에 넣으려다가 냄새를 맡아본다
지호의 체취가 아직 남아있는 듯하다.
Cut to
꺼져있던 휴대폰을 충전기에 연결하고 전원을 켠 뒤 전화를 하는 상민.
상민/ 나야. 바뻐?
재석/ (E) 지금 골프장이야. 무슨 일, 있어?
상민/ 아니. 그냥.
재석/ (E) 거긴 몇 시지? 밤 아냐?
상민/ 응, 밤이야. (사이) 아까 핸드폰 배터리가 없었거든... 혹시 전화했나 해서.
재석/ (E) 난 안했는데. 근데, 스카이프로 하라니까 왜 그냥 전화를 했어? 전화비도 비싼데.
상민/ 아참... 끊고 다시 할까?
재석/ (E) 아냐. 지금 나 이동해야 되거든. 그만 자고 내일 해.
상민/
... 알았어요.
전화 끊는 상민, 길게 한숨을 쉰다.
29. 오울루, 국제 학교 앞 / 낮
캠프 갔던 아이들이 돌아오는 날.
아이들이 버스에서 내리자, 기다리던 학부형들이 저마다 자신들의 아이를 끌어안고 반가워
한다. 상민도 그들 틈에 서있다가 종화를 보고 달려가서 품에 안는다.
상민/ (눈물까지 글썽이며) 안녕?
종화/ 발이, 발이 막 집에 가고 싶어.
상민/ 으응, 발이 시려워. 그래, 집에 가자.
상민, 종화의 손을 잡고 돌아서는데 먼발치로 지호의 SUV가 멈춰 서는 게 보인다.
그쪽을 응시하는 상민.
버스 앞에서 기다리던 유림이 그 쪽으로 걸어가는 게 보이고, 잠시 후 차에서 문주가 내려
환한 얼굴로 유림이에게 뛰어간다.
지호는 오지 않았다.
상민, 씁쓸하게 웃는다.
종화/ (노래) 앞 뒤가 똑같은 전화번호, 앞 뒤가 똑같은...
상민/ (따라 부르며) 전화번호, 1577, 1577, 대리운전 1577...
상민, 종화와 함께 노래 부르며 버스 정류장 쪽으로 걸어간다.
30. 서울, 공항로 / 저녁 무렵
차창 밖으로 스치는, 낯익은 서울의 강변 풍경.
효선(상민의 샾 매니저)이 운전하는 카니발에 타고 있는 상민과 종화.
효선/ 예전엔 몰랐는데, 언니 없으니까 빈자리가 크더라구. 매출도 좀 줄어든 거 같고.
상민/ 설마. 겨우 3주 나가있었는데 그 사이에 무슨.
효선/ 알잖아요. 우리 비즈니스가 다 안면으로 하는 거. 손님들 반은 왔다가 언니 없으면
그냥 물건만 보고 돌아가요. 짜증나게...
상민/ 그랬어? (뒤 좌석의 종화를 돌아보며) 종화야, 안졸려? 비행기 안에서 못잤잖아.
종화, 대꾸 없이 건담 시리즈 장난감만 만지고 있다.
효선/ (룸 미러를 보며) 좀 얌전해진 거 같네... 핀란드 어땠어요? 많이 춥다면서.
상민/ 응. 추워. (창밖을 보며) 근데... 좋아. 계속 눈이 오고.
효선/ 눈이야 뭐... 여기도 엄청 오는데.
상민/ 아냐. 많이 달라. 아주 많이.
효선/ 뭐가 그렇게 달라요?
상민/ 나, 곰도 봤어.
효선/
...?
강변을 달리던 차가 청담동 방향으로 빠져나간다.
31. 서울, 상민의 집 / 저녁
고급 주택가에 위치한 빌라.
현관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오는 상민과 종화.
상민/ 와... 집에 왔다.
도우미 아줌마가 부엌에서 나와 둘을 반긴다.
아줌마/ 오셨어요?
상민/ 예. 잘계셨죠? 종화야, 인사해야지?
종화/ 인사해. 인사.
아줌마/ 어, 종화가 그새 키가 컸나보다.
아줌마가 머리를 쓰다듬으려는데 그냥 지나쳐서 서재 쪽으로 뛰어가는 종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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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 문을 열어보는 상민.
종화, 의자에 앉아있는 재석의 무릎 위에서 가슴을 마구 때리며 반가움을 표시하고 있다.
재석/ (웃으며) 어이구, 아파라. 그 사이에 힘이 더 세졌네요.
상민/ 종화야. 아빠 아파. 그만 해.
재석/ (오히려 종화를 끌어안으며) 아빠도 종화가 많이 보고 싶었어요...
상민, 애틋하게 안고 있는 두 사람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재석/ (상민에게) 당신도 이리와 봐.
상민/ 왜?
재석/ 간만에 마누라 좀 안아보게.
상민, 피식 웃으며 재석에게 다가가고... 앉은 채로 상민의 허리를 감싸 안는 재석.
재석의 팔에 안긴 채로 책상 위에 켜져있는 모니터 화면을 보는 상민.
재석이 패널로 출연한 방송 프로그램이다.
상민/ 모니터링 하는 거야?
재석/ 응. 고정 패널이라서 신경 많이 쓰이네. 지내기 괜찮았어?
상민/ 괜찮으면. 아예 거기 가서 살으라구?
재석/ 힘들었나보구나...
상민/ 나야 힘들 게 뭐 있어. 종화가 어떤지 몰라서...
재석/ 어차피 큰 기대하지 말자고 했었잖아. 잘 돌아왔으면 된 거야. 좋은 경험 했다,치고.
상민/ (물러나며) 짐 좀 풀어야지.
재석/ 담배 냄새난다. 끊었다더니 또 피기 시작한 거야?
상민, 나가다가 멈칫 하고 옷 냄새를 맡아본다.
32. 오울루, 건축 사무실 / 낮
사무실 창가에 서있는 지호.
단조로운 건물들이 눈에 덮여있는 거리가 내려다보인다.
시계를 보고는 코트를 집어 들고 밖으로 나가려는데 동료와 마주 친다.
동료/ (영어) 어디, 가?
지호/ (영어) 잠깐 볼일이 있어서.
동료/ (영어) 좀 있다가 사장한테 브리핑하기로 했잖아.
지호/ (영어) 그 전에 올게.
지호, 급히 사무실을 나선다.
33. 오울루, 국제 학교 앞 / 낮
학교 앞에 차를 세우고 운전석에 앉아있는 지호, 오가는 사람들을 유심히 보고 있다.
수업을 마친 유림이 미치코의 손을 잡고 나오자 차에서 내려 손을 흔드는 지호.
미치코/ (의아해하며)(영어) 어? 왠일이세요?
지호/ (영어) 지나가는 길에... 태워다 줄까 해서.
유림과 미치코가 차에 타는데, 여전히 지호는 주위를 살피고 있다.
미치코/ (영어) 안가세요?
지호/ (영어) 으응... (차에 타며) 혹시... 여기 다니던 한국 남자 아이 알아요?
미치코/ (영어) 엄마랑 늘 같이 다니던 애요? 한국으로 돌아갔다던데요.
지호/
(묵묵히 차를 출발시키며) .....
34. 서울, 상민의 집 / 밤
침대에서 곤히 잠들어있는 상민.
곁에 누워있던 재석이 상민의 팬티를 천천히 벗긴다.
눈을 살짝 뜨며 재석을 돌아보는 상민.
재석/ 피곤하지? 그냥 눈 감고 있어.
상민/ (졸린 듯이) 음...
재석/ (상민의 몸 위로 올라오며) 오랜만이잖아.
상민/
... 그거 없어요? 나 오늘 위험한 날인데.
재석/ 알아서 할게.
재석, 상민의 안으로 들어가 몸을 움직이기 시작한다.
눈을 감고 베개에 얼굴을 묻은 채 조금씩 신음 소리를 내는 상민.
그때 종화의 방 쪽에서 소리가 들린다.
행위를 멈추는 재석, 늘 그랬다는 듯이 허탈하게 웃으며 일어나려한다.
상민/ 자요. 내가 가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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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몽을 꾼 듯,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뱉으며 벽 구석에 머리를 처박고 있는 종화.
상민, 다가가서 종화를 품에 안고 바닥에 함께 눕는다.
상민/ (머리를 쓰다듬으며) 괜찮아... 괜찮아... 자고 일어나면 잊어버릴 수 있어.
나도... 그랬음 좋겠어...
길게 F.O.
35. 서울, 상민의 샾 / 낮
(시간 경과)
따스한 햇살이 내리쬐는 봄.
개성 있는 가게들이 모여 있는, 고즈넉한 언덕길 코너에 위치한 디자이너 브랜드 매장.
단골 손님인 30대 여자가 돌아다니며 옷을 보는데 그 곁에 상민과 효선이 따라다니고,
그 뒤쪽엔 반듯하게 정장을 입은 여직원들이 지켜보고 있다.
한 직원이 다가와 커피를 건네자 받아서 냄새를 맡아보는 여자.
여자/ 난 여기 커피가 젤 좋더라... 지난번에 우리 집에 보내 주신 거하고 같은 건가?
효선/ 그땐 코스타리카였구요, 이건 만델링이예요.
여자/ 아... 이것두 좋네요. (옷을 하나 꺼내 펼쳐보며 상민에게) 뉴욕엔, 언제 가요?
상민/ 원래 다음 달 쯤 가야 되는데, 언니가 서울에 올 거라서 가을로 미뤘어요.
여자/ 맞아. 런칭할 때 됐지... 기대된다.
상민/ 이번엔 크게 안하고 작게 할 거래요. 경기가 다 안좋아서.
여자/ 암튼 부러워요. 나도 사장님처럼 그런 언니 있음 좋겠어.
상민/ 아유, 뭐가 그렇게 부러우세요.
여자/ 부럽죠. 완전 잘나가는 디자이너잖아요. 서울도 아니고 뉴욕에서. 얼마나 멋있어요.
(옷을 가리키며) 이거, 피팅 좀.
직원이 다가와 옷을 꺼내들고 피팅 룸으로 여자를 안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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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유리로 매장이 내려다보이는 2층 사무실.
상민, 효선과 함께 컴퓨터 모니터로 쇼윈도우 샘플 사진들을 보며 상의를 하고 있다.
36. 상민의 샾 앞 길, 주차장 / 낮
언덕길을 걸어 내려가는 상민.
공영 주차장으로 들어서서 자신의 차 쪽으로 가는데 휴대폰 벨이 울린다.
상민/ (전화 받으며) 예. (사이) 아, 예. 선생님, 안녕하세요. (사이) 예? (표정 굳어지고)
아, 그래요... 어쩌지. 혹시 애들이 다치거나 하진 않았구요?
37. 거리, 상민의 차 / 낮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운전을 하고 있는 상민.
사거리의 신호 대기선에 멈춰 선다.
상민, 시선을 돌리는데 옆 차선에 자주색 SUV가 서있는 게 보인다.
핀란드에서 지호가 타던 차와 브랜드와 색깔이 똑같다.
유심히 보던 상민, 자신의 차를 조금 앞으로 전진시켜서 운전석의 사람을 확인해보지만...
머리가 하얀 노신사가 앉아있다.
당연히 지호일 리가 없는데도 자신이 했던 행동에 어이가 없다는 듯, 쓴 웃음을 짓는 상민.
38. 수영장 / 저녁 무렵
상민, 수영복을 입은 하정(종화의 개인 교사)과 벤치에 앉아있다.
두 사람의 시야엔 풀 안에서 강사에게 수영 치료를 받고 있는 종화가 있다.
하정/ 책을 찢어요?
상민/ 응. 주위에 있는 애들 교과서를 다 찢었대.
하정/ 어휴...
상민/ 책이야 새걸로 사주면 되니까. 그나마 애들 안때린 게 다행이지...
(긴 한숨) 핀란드 갔다 와서 좀 나아진 줄 알았는데.
하정/ (애처롭게 보며) 환경이 바뀌어서 그럴 거예요. 애들이 낯설어서.
(위로하듯) 그래도 그림은 얼마나 잘 그리는지 몰라요. 집중력이 있나봐요.
상민/ (바닥을 물끄러미 보다가) 하정씨는 발이 참 예쁘구나. 몸도 예쁜데.
하정/ 어? 아니에요. 다이어트 해야되요. 사모님이야말로 처녀 같으세요.
상민/ (풋, 하고 웃으며) 처녀는. 내가 나이가 몇인데...
하정/ 정말이에요. 저랑 별 차이 안나보일걸요.
상민/ 그럼 왜 나한테 사모님이라구 해? 언니라구 불러야지.
하정/ (머뭇) 그건...
상민/ 거봐. 빈말하니까 당황하지.
하정/ (난처한) 아닌데...
강사가 끝났다고 호루라기를 불며 수신호를 한다.
상민, 물 밖으로 나오는 종화에게 다가가 수건을 둘러준다.
하정이 종화의 손을 잡고 샤워실 쪽으로 달려간다.
그 둘의 모습을 뒤에서 보고 있는 상민.
39. 상민의 집 / 저녁
종화의 방.
하정이 종화를 옆에 앉혀놓고 그림 치료를 하고 있다.
열린 문 틈으로 방 안을 보는 상민.
알 수 없는 그림을 열심히 그리고 있는 종화의 모습.
다소 안도하는 표정으로 부엌으로 가는 상민, 테이블 그릇에 쌓여있는 삶은 계란들을 본다.
상민/ 아주머니. 종화, 오늘 이거 몇 개나 먹었어요?
아줌마/ (난처한 얼굴) 벌써 한 열 개 쯤요. 요 며칠 계속 그거만 먹어요. 못 먹게 할 방법
도 없고...
상민/ (한숨) 큰일이네...
그때, 현관 쪽에서 소리가 나서 상민이 나가보면 퇴근해서 돌아온 재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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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레싱 룸.
재석이 옷을 갈아입고 있고, 상민이 그 뒤에 서서 옷을 받아 걸어준다.
재석/ 그래서, 물어줬어?
상민/ 책값하고, 문구 세트 하나씩 해서 보내줬어. 집집마다 일일이 사과 전화 다하고.
재석/ (아무렇지 않은 듯) 그럼 됐지 뭐.
상민/ 이참에... 강북 쪽으로 전학을 시키면 어때? 강남에 있는 학교는 왠지 좀 그런 거 같
아. 부모들 항의도 심한 거 같고.
재석/ 이봐요, 이상민씨. 강북으로 가면 좀 나을 거 같아요? 어차피 일반 학교는 어딜 가든
차별이 있을 수밖에 없어.
상민/ 그래도 좀 낫지 않을까 싶어서...
재석/ 내가 그랬잖아. 일반 학교를 고집하면 안된다구. 특수 학교 다니면 좀 어때서.
여긴 핀란드가 아냐.
상민/ 특수 학교는... (고개 저으며) 아냐. 안돼.
재석/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지금 당신 그러는 거, 남들이 보면 허영이야.
(복도로 나가며) 괜히 핀란드는 보내줬더니...
혼자 남겨진 상민.
종화의 방 쪽에서 소리가 들려온다.
재석/ (소리) 우리 종화, 선생님이랑 그림 그렸어요? 뭐 그렸어요?
종화/ (소리) 비행기,비행기,비행기...
재석/ (소리) 와, 멋있는 비행기네요. 이거 타고 어디 갔었어요?
종화/ (소리) 비행기,비행기...
40. 상민의 샾 / 낮
신상품들이 들어온 날이라 직원들이 모두 분주하다.
그들 곁에서 상민이 박스들을 하나씩 점검하고, 아이패드를 든 효선이 따라다니며 상품 번
호와 수량들을 체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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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 사무실.
상민과 효선, 직원들이 모여앉아 피자를 나눠 먹고 있다.
효선/ 에이, 누가 컴비네이션으로 시켰어. 페퍼로니 치즈로 하랬는데.
직원1/ 페퍼로니, 너무 심심해요.
효선/ 니네가 피자 먹을 줄을 모르는 거야. 피자는 기본이 페퍼로니라니깐.
직원2/ (상민에게) 사장님, 왜 안드세요.
상민/ 난 별로 배가 안고파.
효선/ 이 분은 느끼한 거 안좋아하시잖어.
직원2/ 피자두요? 맛있는데...
상민/ (정색하며) 아냐. 잘 먹어.
효선/ 외국 갈 때마다 볶은 고추장 한 박스 씩 들고 가시면서 무슨...
직원1/ 그러고보니 지난 번에도 피자집에서 회식했었는데.
효선/ 아, 장관 사모님이 하는 집? 거기 맛있었어.
직원3/ 그 사모님, 진짜 특이하잖아요.
상민/ 어떤데?
직원3/ 신상 나온 거 먼저 산 다음에, 전화해서 누가 같은 거 샀냐고 꼭 물어봐요.
효선/ 하여튼 지랄은...
상민/ 욕심이 많은가보다.
직원1/ 피자 보니깐 맥주 마시고 싶어요... 아사히 생맥주.
상민, 애써 즐거운 표정을 짓지만 왠지 마음이 편치 않다.
41. 초등학교 / 낮
종화가 다니는 강남의 사립 초등학교.
텅 빈 복도를 걸어가는 상민, 멈춰 서서 창을 통해 교실 안을 살짝 들여다본다.
열심히 수업을 받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
아이들 한명씩 훑어보다가, 창가 맨 뒷자리에 앉아 있는 종화에게 시선이 멈춘다.
종화, 창밖을 멍하게 바라본 채 수업에는 관심이 없어보인다.
42. 상민의 집 / 밤
소파에 종화와 나란히 앉아 TV를 보고 있는 상민.
교육 방송에서 아동 상담 프로그램을 하고 있는데, 패널로 출연한 재석이 화면에 잡힌다.
화면 밑에 ‘신경정신과 전문의 안재석 박사’라는 자막이 뜬다.
건담 장난감을 만지작거리던 종화가 갑자기 리모콘을 들고 채널을 이리저리 돌린다.
상민/ (달래며) 아빠 나오는 거 봐야지, 응?
계속 신경질적으로 리모콘을 누르던 종화, 어느 CF 장면에서 멈추고 노래를 따라 부른다.
종화/ 대출은 대출은 원캐싱, 1588 빨리 십분 원캐싱, 1588 빨리 십분....
43. 상민의 샾 앞 / 낮
쇼윈도우 앞에 서서 디스플레이 된 의상들을 보고 있는 상민과 효선.
상민, 뭔가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고개를 숙이고 생각에 잠긴다.
효선/ 어디가, 이상해요?
상민/ 응... 볼 때 마다 자꾸 맘에 걸려.
효선/ 뉴욕 매장하고 같은 컨셉인데...
상민/ 우리 건물 외관하고는 좀 안맞는 거 같거든.
효선/ 디스플레이 불러서 상의해보죠 뭐.
상민/ 아까 내가 통화했어.
효선, 갑자기 상민의 어깨 너머 어딘가를 응시한다.
한 남자가 가게들 앞을 하나씩 지나치며 쇼윈도우 안을 들여다보고 있다.
효선/ (고개를 갸웃) 왜 저럴까...
상민/ 응?
상민, 효선을 돌아보곤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보는데...
길 건너편 가게 앞에 서있다가 몸을 돌리는 남자는, 지호이다.
놀라는 상민의 표정.
지호, 주위를 둘러보다가 건너편의 상민을 발견하곤 활짝 웃으며 길을 건너온다.
효선/ 어어? 이쪽으로 오네.
지호, 상민과 효선 앞으로 다가와 선다.
지호/ (샾 건물을 둘러보며) 여기였네요. 아, 힘들어라.
상민/ (잠시 할말을 잃고) .....
효선, 무슨 영문인가 싶어 상민과 지호를 번갈아 본다.
44. 상민의 샾 / 낮
2층 사무실.
통유리 앞에 서서 매장을 내려다보고 있는 지호.
상민이 커피를 들고 들어와 테이블에 앉는다.
지호/ 매장이 꽤 커요.
상민/ 큰가요? 잘 모르겠네.
지호/ 이런 데는 아닐 거라고 생각했는데.
상민/ 아... 저한테 안어울린다, 뭐 그런 뜻?
지호/ (마주 앉으며) 그런 건 아니구. 근엄한 사장님 스타일로 보이진 않았거든요.
상민/ 사장은 꼭 근엄해야 되나...
지호/ (난처한) 이상하게 말이 자꾸 꼬이네.
상민/ 괜찮아요. 사실 뭐, 전 무늬만 사장이에요. 매장 담당. 실제 주인은 따로 있구.
지호, 상민 뒤 편의 벽에 걸린 디자이너(상희)의 사진을 본다.
지호/ 저 분?
상민/ 뉴욕에 있는 제 언니. 저 빼고 가족이 다 거기 살아요.
지호/ 유명한 분을 언니로 두셨어요...
두 사람, 커피를 한 모금씩 마신다.
상민/ 서울엔, 아주 나오신 거예요?
지호/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고. 아직 결정을 못했어요. 그 쪽 계약 기간은 끝났고,
예전에 약속한 일이 하나 있어서 나오긴 했는데. (테이블 위 명함 케이스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 보며) 이상민 대표님... 위가 좋아지셨나봐요.
상민/ 예?
지호/ 이제 커피를 드시네. 위가 안좋아서 안마신다고 그랬잖아요.
상민/ (기억을 되살리며) 아... 가끔은 마셔요.
노크 소리가 나고 직원1이 고개를 내민다.
직원1/ 사장님, 디스플레이 팀 왔는데요. 좀 기다리라고 할까요?
상민/ (잠시 머뭇) .....
지호/ 전 갈게요. (일어선다) 일 보세요.
직원이 나가고 문을 닫는다.
상민/ 우연은... 아니죠?
지호/ 반반. 궁금하기도 했고, 마침 지나가는 길이어서.
상민/
.....
지호/ 갈게요. (문을 열며) 하야트 쪽부터 내려왔으면 금방 찾았을텐데 바보같이 저 밑에서
부터 올라오느라 힘들었어요. (웃어보이고 나간다)
상민, 통유리 너머로 매장을 나가는 지호를 지켜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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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 윈도우에서 디스플레이 팀원들과 이야기 중인 상민.
들고 있던 휴대폰에서 신호음이 들린다.
확인 버튼을 누르자 액정에 뜨는 문자.
‘다시 봐서 반가웠어요 - 김지호’
번호를 저장할까... 망설이는 상민의 표정.
45. 초등 학교 앞 거리, 지호의 차 / 낮
길가에 세워진 지호의 차.
지호, 운전석에 앉아서 학교 쪽을 보고 있다.
교문을 막 빠져 나온 유림, 조수석 쪽 문을 열고 탄다.
지호/ (차를 출발시키며) 오늘 어땠어, 재밌었어?
유림/ (보지 않고 고개만 끄덕이는) .....
지호/ 아빠 얼굴 보구 얘기하면 안될까?
유림/ (아예 시선을 창밖으로 돌려버리며) .....
지호/ 흠... 안되는구나.
46. 카페 / 저녁 무렵
아직 이른 시간이라 손님이 별로 없는, 세련된 카페.
문주가 친구 둘(한명은 주인)과 맥주를 마시며 수다를 떨고 있다.
지호가 들어서서 그녀들이 앉아있는 테이블로 다가온다.
문주/ (지호를 보고 환하게 웃으며) 우리 기사님 오셨네...
지호/ (친구들에게) 안녕하세요?
문주/ 왜 혼자에요. 유림이는?
지호/ 차에 있어. 나가자.
문주/ 좀 더 놀다가게 유림이 데리고 들어와.
지호/ (난처한) .....
친구1/ (눈치를 보며)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나두 가야겠다.
문주/ 어어? 왜 그래. 나 애 땜에 한번 나올려면 힘들어.
친구2/ 오늘만 날이니. 담에 또 놀러와, 응?
친구1,2, 먼저 일어나고 테이블엔 지호와 문주만 남게 된다.
문주/ 하여튼 내가 뭘 못해... (신경질적으로 일어선다)
47. 지호의 집 / 밤
상가 주택의 맨 위 층에 위치한 지호의 집.
건축가답게 로프트 스타일로 쾌적하게 꾸며진 실내.
유림의 방.
취기가 오른 문주, 옷도 벗지 않은 채 유림을 안고 침대에 털썩 눕는다.
문주/ 니네 아빠가 말야. 엄마를 자꾸 가둬놓는다? 왜 그런 줄... 유림이는 알아?
유림/ ... 왜요?
문주/ (유림의 머리를 품에 끌어안고) 엄마가 챙피하대.
문밖에서 보고 있던 지호, 굳은 표정으로 욕실로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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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실의 샤워 부쓰.
샤워를 하고 있는 지호.
욕실 문이 열리고, 문주가 옷을 벗으며 부쓰 안으로 들어온다.
좁은 부쓰 안에 바싹 붙어 서있게 된 두 사람.
문주, 잠시 눈을 감고 얼굴에 물줄기를 받다가 돌아서서 지호의 가슴에 키스를 한다.
가만히 서서 문주에게 몸을 맡기는 지호.
문주/ (다시 돌아서며) 뒤로 해줘.
지호, 문주의 허리를 감싸 안고 안으로 들어간다.
신음 소리를 내는 문주.
문주/ 나 사랑해?
지호/ (계속 몸을 움직이며).....
문주/ 사랑한다고 말해 봐.
지호/
.....
문주/ 사람이 어쩜 그렇게 솔직해... 이럴 때 남자들은 거짓말도 하는 건데.
지호, 행위를 멈추고 한숨을 내쉰다.
문주, 뒤로 손을 뻗어 지호의 성기를 손에 쥔다.
문주/ 어어. 죽었네...
문주, 돌아서서 무릎 꿇고 앉아 지호의 성기에 키스하기 시작한다.
지호/ (문주에게서 물러나며) 다음에 하자, 응?
부쓰에서 나가는 지호, 타월로 몸을 닦는다.
문주/ 이제 서지두 않아? 하기 싫음 말을 하지. 노력하는 척은 왜 하니.
지호, 묵묵히 듣고 있다가 욕실을 나간다.
48. 이태리 식당, 주차장 / 낮
주차장에 서서 기다리고 있는 재석.
택시에서 내린 상민, 종화의 손을 잡고 걸어온다.
재석/ 애는 왜 데리구 온 거야?
상민/ 하정씨가 갑자기 일이 생겨서 안된다잖아.
재석/ 자리 또 산만해지겠네... 또 내가 종화 옆에 붙어있어야 되?
상민/ 좀 그러면 안되요?
재석/ (종화 손을 잡고 입구로 들어가며) 무슨 케잌 샀어, 롤 케잌 산거 맞지?
상민/ (장난스럽게) 네 -.
종화/ (따라 하는) 네, 네 -.
재석/ 우리 종화, 대답도 씩씩하네...
49. 이태리 식당 / 낮
상민의 시어머니 생일을 맞아 식사하는 자리.
시부모, 둘째 아들 내외, 시누이 내외 그리고 아이들과 함께 앉아있는 상민의 식구들.
롤 케잌에 꽂은 초에 불을 붙이고 모두 축가를 부른다.
초가 꺼지고 모두들 박수를 친다.
재석/ 종화야. 할머니한테 뽀뽀해드려야지.
하지만, 종화는 아예 자리에 앉지도 않고 테이블 주변만 계속 돌고 있다.
시어머니/ (한숨 쉬며) 생긴 건 저렇게 멀쩡하게 예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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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 이태리 요리를 곁들여 샴페인을 마시며 즐겁게 이야기 하고 있다.
식당 매니저가 들어와 정중하게 인사한다.
매니저/ 어이구, 오늘은 병원 원장님만 네 분이나 오셨네요.
시아버지/ (주위를 둘러보며) 어? 그러네.
매니저/ 생신이시라는데, 제가 선물로 좋은 와인 좀 올릴까 해서요.
시아버지/ 좋-지. 그거 있나? 오퍼스 원.
매니저/ 그럼요.
시아버지/ 그거 두어 병 줘봐. 김치도 좀 주고.
매니저/ 뭐, 더 필요한 거 없으시구요.
상민/ 혹시요... 삶은 계란 좀 몇 개 주실 수 있나요? 애가 그걸 좋아해서...
매니저/ (잠시 머뭇) 갖다드리겠습니다.
시어머니/
... 삶은 계란?
계속 종화 곁에 앉아있던 재석, 상민을 흘겨본다.
50. 가라오케 / 낮
완전히 분위기를 바꿔 흥청거리며 놀고 있는 재석의 가족들.
둘째 며느리가 딸과 함께 춤을 추며 신나는 댄스 곡을 부른다.
시아버지/ 야, 누가 폭탄 좀 시원하게 말아봐라.
둘째 아들/ 아빤 저보다 사위가 하는 거 좋아하시잖아요.
시아버지/ 그래. 배서방이 해라. 정확하게 5부로.
사위/ 예엡, 알겠습니다.
시아버지/ 역시 낮술이 좋아, 낮술이.
모두들 술도 마시고 박수도 치면서 즐거워하는데 정작 주인공인 시어머니의 표정만 어둡다.
상민의 시선으로, 대형 모니터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있는 종화와 재석이 보인다.
시누이/ (상민에게) 언니, 정말 둘째 계획은 없는 거예요?
상민/ (살짝 당황) 둘째는 뭐... 어렵지. 나이도 있고.
시누이/ 나이가 뭘. 마흔도 안됐는데. 나 아는 선배 언니는 오십 다 돼서 첫 애를 낳았어.
상민/ 종화 아빠랑 예전에 다 결정했던 거라서...
둘째 아들/ 형이 문제야, 형이. 그거 유전되는 것도 아닌데 말야. 소심해서 그래.
시누이/ 하여튼 큰오빠 성격은... 아니 그리고, 정신과 의사면서 자기 애 하나도 못고치나?
이해가 안되.
둘째 아들/ 알지두 못하면서 무식한 소리 좀 작작 해라. 좋은 자리에서.
(상민에게 건배하며) 형수님, 신경쓰지 마세요.
시누이/ 왜 그래? 내가 뭐, 나쁜 말했어?
둘째 아들/ 씨발, 조용히 좀 하라니까.
시누이/ 오빤 왜 나만 가지고 지랄이야?
시아버지/ 쟤네들은 또 왜 저래?
사위/ (분위기를 바꾸려고) 자, 자, 다음 노래는 우리 안재석 박사님 -.
재석이 마이크를 받아드는데 곁에 있던 종화가 갑자기 마이크를 뺏어들고 반주도 없이 노래
를 한다.
종화/ 대출은 원캐싱, 원캐싱, 1588 빨리십분 원캐싱...
일순간 종화를 바라보며 말이 없어진 사람들.
재석/ 종화야, 마이크 아빠 주세요. 아빠 주세요.
듣지 않고 계속 반복해서 노래를 부르는 종화.
상민이 벌떡 일어나서 다른 마이크를 집어 들고 종화 곁으로 가서 같이 노래를 부른다.
시아버지/ 여어, 잘하는구나. 우리 손자. (박수를 친다)
당황하던 도우미가 탬버린으로 박자를 맞춰 주자, 멍하게 보던 사람들도 얼떨결에 박수를
치기 시작하는데... 종화를 바라보던 시어머니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린다.
종화와 상민의 노래는 계속 되고, 시어머니는 어린 아이처럼 엉엉 울고...
난장판이다.
51. 거리, 재석의 차 / 저녁 무렵
집으로 돌아가는 재석의 차.
상민이 운전을 하고 있고, 뒷자리엔 재석이 잠든 종화를 안고 있다.
재석/ 엄마도 주책이지. 나이 칠십 다돼서 무슨 이혼이냐. 아무리 아빠가 바람 좀 폈다고...
상민/ (마음이 복잡한 듯) .....
휴대폰 벨 소리.
상민, 휴대폰을 들어서 보면 발신자 이름이 없다.
잠시 고민하다 받는 상민.
상민/ 여보세요.
지호/ (E) 저, 김지호에요.
상민/ (당황하지만 침착하려 애쓰며) 아, 예.
지호/ (E) 샾에 있어요?
상민/ 아니요. 오늘 집안 일이 있어서 나와 있어요.
지호/ (E) 그러시구나. 계시면 놀러갈까 했는데.
상민/ .....
지호/ (E) 나중에 다시 연락할게요.
상민/ .....
지호/ (E) 그래도 되죠?
상민/ (사무적으로) 예, 예.
전화 끊는 상민.
재석/ 누구?
상민/ 응... 매장 손님.
52. 갤러리 공사 현장 / 저녁 무렵
한창 공사 중인 갤러리.
일과를 마친 인부들이 하나 둘씩 퇴근하고 있다.
2층 테라스, 휴대폰을 든 채 서있는 지호.
인부/ (나가다가 지호를 올려다보고) 김소장, 안가?
지호/ 정리 쪼금 더 하구요. 먼저 가세요.
인부/ 두부집에서 소주 한잔 할 건데, 거기로 올래?
지호/ 두부... 좋죠. 좀 있다 갈게요.
53. 상민의 집 / 아침
한가로운 일요일 아침.
거실 바닥에 앉아 마른 빨래를 개고 있던 상민, 문득 창밖을 본다.
구름 한 점 없이 푸른 하늘.
한동안 그쪽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상민.
그때, 욕실에 있던 도우미 아줌마가 물을 흠뻑 뒤집어 쓴 채 급히 나온다.
상민/ ?
아줌마/ 사모님, 좀 들어가 보셔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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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민이 욕실로 와 보면, 욕조 속에 앉아있는 종화가 목욕물을 마시고 있다.
상민/ 종화야. 그거 더러워. 마시면 안돼.
듣지 않고 계속 마시는 종화.
상민, 어쩔 수 없다는 듯 종화를 번쩍 들어서 욕실 밖으로 내놓고 물을 빼버린다.
이상한 소리에 돌아보는 상민, 종화가 이번엔 변기물을 손으로 떠서 마시고 있다.
상민/ (종화의 허리를 감싸며) 그만.
상민과 종화의 버티기가 시작되고... 느닷없이 상민의 뺨을 후려치는 종화.
상민, 반사적으로 종화의 등을 마구 때리기 시작한다.
상민/ 그러지 말랬잖아! 하지 말라면 좀 하지 마!
이성을 잃은 듯이 종화를 몰아붙이던 상민, 갑자기 멈추고 숨을 고른다.
상민/ (감정을 추스르며) ... 미안. 엄마가, 종화 걱정되서 그런 거야...
상민, 일어서서 수건을 집으려는데 갑자기 욕실 거울에 머리를 쿵,쿵 들이받는 종화.
퍽! 하고 거울이 갈라지고... 바닥으로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진다.
놀라서 아무 말도 못하고 굳은 듯이 서서 자신의 발밑으로 흐르는 선혈을 보고 있는 상민.
54. 종합 병원, 응급실 / 낮
고개를 숙인 채 복도 벤치에 앉아있는 상민.
하정이 응급실에서 나와 상민에게 다가온다.
상민/
... 뭐래?
하정/ 신경은 안다쳤데요. 열두 바늘 꿰매고, 지금 마취 땜에 자요.
상민/
.....
하정/ 그만하길 정말 다행이지 뭐예요.
상민/ (깊은 한숨) 고마워, 하정씨. 와줘서...
하정/ 어휴, 제가 아직도 심장이 벌렁거려요. 아줌마가 전화로 막 울면서 얘기하는데...
상민/
.....
하정/ 들어가 보세요.
상민/ 아냐. 나... 못보겠어. 좀 있다가.
하정/ (상민 손의 상처를 보고) 다쳤어요?
상민/ (몰랐다는 듯) ... 그러네.
재석이 급한 걸음으로 복도를 걸어온다.
재석/ (잔뜩 흥분해서) 치료 끝났어?
하정/ 예. 지금 자고 있어요.
재석/ (상민을 노려보며) 너... (뭐라 하려다가 꾹 참고)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해. 알았지?
상민/
......
재석/ 불안한 표정도 하지 말고. 그럼 애한테 더 안좋아. 아버지, 어머니한테도 알리지 마.
난리 피실테니까.
의사/ (응급실에서 나오며) 어, 재석이 형.
재석/ (표정 바꾸고) 야, 오랜만인데 이런 일로 보네. 어이없게...
재석, 후배 의사를 따라 응급실로 들어간다.
55. 지호의 집 / 낮에서 저녁까지
옥상 정원에 모여 바비큐를 하며 술을 마시고 있는 사람들.
대부분 지호의 초대로 온 건축학과 동창들이다.
문주, 밝은 표정으로 사람들에게 핀란드 얘기를 하고 있다.
정원으로 연결된 부엌. 지호가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고 있다.
화장실에 나오던 세나가 보고 다가온다.
세나/ 도와줄까?
지호/ 응. (맥주 몇 캔을 건넨다)
세나/ (창문으로 정원을 내다보며) 문주씨, 좋아보인다.
지호/ 그래?
세나/ 유림이는?
지호/ 자기 방에 있어.
세나/ 왜. 나와서 같이 먹게 하지.
지호/
... 아직 좀, 낮을 가려서.
세나/ 갤러리 공사 끝나면, 어떡할 생각이야? 핀란드로 돌아갈 거야?
지호/ 글쎄. 아직 모르겠다.
세나/ 맨날 모른데. 아직도 모르면 어떡하냐.
사람들과 함께 있던 문주, 지호와 세나가 함께 나오는 모습을 유심히 본다.
Cut to
유림의 방으로 들어오는 지호.
문주가 책상에 앉아있는 유림의 어깨를 감싸안고 이야기를 하고 있다.
문주/ 엄마랑 나가서 고기 먹자, 응?
유림/ (고개 저으며) .....
지호/ 놔 둬. 싫다잖아.
문주/ (느닷없이) 누군 좋겠네. 세나 언니 와서.
지호/
.....?
문주/ 둘이 뭐, 눈빛이 장난 아니던데.
지호/ 또 그런다...
문주/ (들은 척 않으며) 유림아, 진짜루 고기 안 먹을거야?
지호/
..... (보다가 돌아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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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상 정원. 날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다.
긴 테이블에 모여 앉은 사람들, 다들 제법 취해있다.
친구1/ 카모메 식당, 영화 좋았지.
친구2/ 문주씨야 원래 요리 전문가니까 식당해도 잘하겠네.
친구3/ 그래. 서울 오지 말구 혼자 해버리지 그랬어요.
문주/ 그럴까 싶었는데... 그냥 돌아오게 됐네요.
세나/ 아깝다. 했음 좋았을텐데. (곁의 남자 친구에게) 그지? 우리도 식당 구경하러 헬싱키
한번 가보구말야.
문주/ 언니 땜에 못한 건데요.
세나/ ... ?
문주/ 저 사람, 언니네 갤러리 땜에 들어온 거잖아. 아니. 그것도 핑계인가? 사실은 아직도
사랑하는 사이일지도 모르지.
세나/ (애써 침착하게) 문주씨, 취했나보다.
문주/ 나, 바보 아니에요. 맨날 친구가 어쩌고 20년 우정이 어쩌고... 남녀 사이에 친구가
어딨어. 웃겨...
지호, 난감한 표정으로 문주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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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관.
남자 친구와 함께 나가는 세나.
지호가 뒤에 서서 보고 있다.
세나/ (돌아보며) 신경 쓰지 마. 우리, 딴데 약속 있어서 먼저 가는 거야.
지호/
.....
세나/ 괜찮으니까, 갤러리나 신경 써 줘. (나간다)
지호, 옥상 정원으로 다시 나오는데... 사람들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주위를 둘러보는 지호, 난간 위에서 맨발로 위태롭게 걷고 있는 문주가 보인다.
문주/ 오빠, 올라와봐. (양팔을 벌리고) 같이 타이타닉하자.
지호/ (다가가며) 위험해, 내려 와.
문주/ 남자가 왜 그렇게 겁이 많아...
그때, 누군가 지호의 어깨를 건드린다.
지호, 곁에 있는 친구가 가리키는 쪽을 보면... 유림이 입구 앞에 있다.
창백한 얼굴로 문주를 응시한 채 서있는 유림, 발 밑으로 소변이 흘러내리고 있다.
사람들, 어찌 해야 할 지 모르고 그냥 보고 있다.
난간에서 내려온 문주, 달려가서 유림을 안고 안으로 들어간다.
문주/ (돌아보며 사람들에게) 가지마세요. 금방 나올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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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들이 모두 돌아가고 적막해진 집.
굳은 표정으로 부엌에서 정리를 하고 있던 지호, 갑자기 문주가 있는 방 쪽으로 걸어간다.
닫혀 있는 방문.
문을 열까, 갈등하다가 그만 두고 돌아선다.
56. 상민의 샾 / 아침
쇼 윈도우 뒤쪽에 서서 거리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상민.
한 손에 붕대를 감고 있다.
효선/ 뭐 보고 있어요?
상민/ (돌아보며) 그냥... 날이 좋아서.
효선/ (상민의 얼굴을 잠시 보다가) 어마나, 흰머리 있네...
상민/ 그래?
효선/ 뽑아줄게. (머리를 만지며 찾는다)
상민/ 혹시, 담배 있어?
효선/ 나 담배 안피잖아요. 여깄다... (흰머리를 한가닥 잡아 뽑는다) 언니, 이거 봐요.
57. 상민의 샾 앞 거리 / 아침
편의점에서 담배를 사서 나오는 상민.
한 개피 꺼내 피우면서 샾 쪽으로 천천히 걸어간다.
샾 건너편에 차 한 대가 비상등을 켜고 서있는 게 보인다.
무심코 지나쳐서 샾으로 들어가려는데 차 창문이 열리면서 지호가 고개를 내민다.
지호/ 점심 먹었어요?
상민/ (잠시 지호를 보다가 피식 웃으며) 아직... 밥 먹긴 이른데.
지호/ 괜찮은 식당 알거든요. 가요.
상민/ (샾 쪽을 보며 고민하는) 갑자기 불쑥 와서...
지호/ 어차피 밥은 먹어야 되잖아요.
58. 갤러리 공사 현장 / 낮
2층 테라스에 서서 주위 풍경을 둘러보고 있는 상민.
안쪽에선 지호가 배달시킨 음식들을 바닥에 늘어놓고 포장을 벗기고 있다.
상민/ 좋은 식당이라더니...
지호/ 좋지 않아요? 넓고 조용하고.
상민/ (둘러보며) 왜 아무도 없어요?
지호/ 일하는 사람들 다 식당으로 갔고... 한 사람은 여길 지켜야죠.
(수저를 건네며) 자, 앉아서 먹읍시다. 좋아하시는 된장찌개.
상민, 수저를 받아들고 곁에 앉는다.
먼저 식사를 시작하는 지호.
상민/ (지호를 보다가) 참... 태평해보여요
지호/ 예?
상민/ 아무 걱정이 없어보인다구요.
지호/ 그래요? 그럼, 상민씨는 걱정이 많아요?
상민/ 글쎄요. 많은가...
지호/ (상민을 보며) 손은 왜. 다쳤어요?
상민/ 싸웠어요. 일대 삼십오로.
지호/ (피식 웃고) 괜히 물어봤네...
텅 빈 공사 현장에서 밥을 먹는 두 사람의 모습.
Cut to
실내를 둘러보는 상민.
지호가 뒤에서 따르며 구조를 설명하고 있다.
상민, 복도 끝의 계단을 오르다가 커다란 창 앞에 멈춰 선다.
상민/ 여기서 보는 뷰가 좋구나...
지호, 상민의 곁으로 다가가서 얼굴을 바라본다.
햇살을 한껏 받고 눈이 부셔서 약간 찡그리는 상민의 표정.
그녀에게 키스하는 지호.
천천히 서로의 입술을 찾는 두 사람.
잠시 후, 밖에서 인기척이 들려온다.
두 사람, 서로에게서 떨어진다.
창밖을 보면, 점심 식사를 끝낸 인부들이 하나 둘씩 정원으로 들어오고 있다.
마주 보고 어색하게 웃는 두 사람.
59. 상민의 샾 / 저녁
매장이 문을 닫은 시간.
상민이 사무실 컴퓨터 앞에서 매출 정리를 하고 있다.
문이 열리고 하정이 고개를 내민다.
하정/ 저 먼저 갈게요.
상민/ 종화는, 뭐해?
하정/ 소파에서 자요.
Cut to
상민, 출입문을 열어주고 하정이 나가면 다시 잠근다.
매장 구석으로 가는 상민.
소파에서 담요를 덮고 곤히 자고 있는 종화의 모습.
차임벨 소리가 들린다.
상민이 다시 입구로 가서 문을 열고 보면 지호가 서있다.
지호/ 옷 좀 보러왔는데. 너무 늦었죠?
상민/
(웃으며) 영업 시간 끝났는데요.
지호/ 아... 어쩌지. 나중에 올까요?
상민, 입구에서 살짝 비켜 서고 지호가 안으로 들어온다.
문을 잠그는 상민의 뒤에 바짝 다가서서 어깨를 감싸 안는 지호.
상민/ (그대로 선 채) 낮에도 만났잖아요.
지호/ 난 분명히 집으로 가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차가 알아서 여기로 오더라구요.
상민/ (피식 웃고) 재미없어...
지호, 느닷없이 상민에게 입 맞춘다.
잠시 눈을 감고 받아들이던 상민, 지호의 가슴을 살짝 밀며 뒤로 물러난다.
상민/ 있잖아요... (하다가 말을 잇지 못한다)
한동안 말이 없는 상민을 바라보던 지호, 다시 상민에게 키스한다.
뒤로 다시 물러서는 상민, 지호의 손을 잡아 끌고 2층으로 올라간다.
사무실로 들어서자마자 서로 격렬하게 키스하는 두 사람.
상민, 키스를 하다말고 불을 끄고는 통유리 너머 아래 층을 잠시 확인하고 다시 지호를
끌어안는다.
지호, 상민을 책상에 기대게 한 채 치마 밑으로 손을 넣는다.
갑자기 숨소리가 커지자, 자기 손으로 입을 막는 상민.
행위를 계속 하는 동안에도 상민은 자신의 입을 막고 지호의 얼굴을 응시하고 있다.
격렬한 몸짓은 있지만, 왠지 심리적으로 억눌려 있는 듯한 느낌의 정사.
그리고... 절정을 맞는 두 사람.
지호, 이마에 땀방울이 맺힌 채 상민의 품에 얼굴을 묻는다.
상민/ (지호의 머리를 만지다가) 땀났어...
상민, 지호의 머리에 입을 맞추고 일어나 옷을 추스르며 창가로 간다.
아래층을 내려다보는 상민, 하지만 소파에서 자고 있던 종화가 보이지 않는다.
상민/ (표정이 굳으며) 어...
지호/ 왜요?
상민/ 종화가 없어. (급히 나간다)
지호/ 응? (따라가며) 애가... 여기에요?
두 사람, 계단을 내려가서 주위를 둘러보지만 종화는 보이지 않는다.
당황해서 얼굴이 창백해진 상민, 입구로 뛰어가서 확인해보는데 문은 잠겨있다.
상민/ 소파에서... 소파에서 자고 있었는데...
상민과 지호, 실내 불을 밝히고 여기저기를 찾아다닌다.
종화의 이름을 부르며 극도로 초조해하는 상민.
지호/ (소리) 여기.
상민, 지호가 있는 쪽으로 가보면 종화가 구석 옷 진열대 밑에 몸을 웅크린 채 자고 있다.
종화를 들어 품에 끌어안는 상민. 종화가 칭얼대기 시작한다.
상민/ (안도하는 표정) 응, 괜찮아, 괜찮아...
지호, 두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상민이 손짓으로 먼저 가라고 한다.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 일어서서 조용히 나가는 지호.
문을 열다가 다시 돌아서서 보면, 바닥에 앉은 채 종화를 꼭 끌어안고 있는 상민의 모습.
애틋하면서도 서글퍼 보인다.
60. 지호의 집 / 밤
어두운 방안에서 자고 있는 유림.
방문 앞에 서서 잠시 보던 지호, 거실로 간다.
문주가 TV를 켠 채 소파에 길게 누워있다.
그녀의 발 쪽에 앉는 지호.
문주/ 오빠.
지호/
... 응?
문주/ 행복하지 않지?
지호/ 무슨 소리야, 그건.
문주/ 날 버려.
지호/ (한숨) .....
문주/ 내가 그러진 못하니까, 오빠가 날 버리는 거야. 그럼 되지 않겠어?
지호/ (어이없다는 듯) 정말... 그러길 바래?
문주/ 저거 봐. 항상 저런 식이지. 솔직하지 않은 거. 그게 오빠의 문제야. 항상 좋은 사람
인 척 할려구 핑계 거리를 만들잖아. 내 와이프는 문제가 있는 사람이니까. 또 아이
도 와이프 땜에 저렇게 됐으니까. 그래서 불행한데, 그래도 떠안고 가겠다...
지호/ 도대체 왜 이러는 거니. 응?
문주/ (몸을 일으켜 앉으며) 괜찮아. 오빠가 어떻게 해도... 나, 원망 안할 자신 있어.
문주, 일어서서 방으로 가고 지호 혼자 남겨진다.
TV에선 버라이어티 쇼에 나온 사람들이 실없는 농담을 주고 받으며 낄낄 대고 있다.
61. 상민의 집 / 밤
어두운 방 안.
침대에 누워있는 상민, 고개를 돌려 자고 있는 재석의 얼굴을 바라본다.
상민/ 자요?
재석/ (졸린 목소리) ... 왜.
상민/ 있잖아. 우리... 아이 가지면 어떨까?
재석/ (눈을 감은 채) 맘이 바뀐 거야?
상민/ 그냥. 가끔 그런 생각이 들어서.
재석/ 종화만 잘 키우자고 한 사람이 당신이잖아.
상민/ 그랬지. 그랬는데...
재석/ 둘째 아이가 있다고 위안이 될 거라는 생각하면 안돼. 그건, 종화한테도 안좋고 다른
아이한테도 절대 좋지 않은 거야.
상민/ 또 분석하신다. 누가 의사 아니랄까봐.
재석/ (상민의 손을 잡으며) 그만 자자. 응?
상민, 천정을 바라본 채 생각에 잠긴다.
62. 상민의 샾 / 낮
단골 손님과 이야기 중인 상민.
휴대폰 벨이 울린다.
상민/ (번호를 보고 손님에게) 죄송해요. 잠깐만. (전화 받으며) 네. (사이) 예, 선생님.
상민, 구석으로 가서 전화를 받는다.
효선이 손님과 이야기를 하다가 상민을 보는데, 그녀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63. 초등학교 / 낮
상민, 상담실에서 선생님과 마주 앉아 있다.
선생님/ 그냥 좀 때린 정도라면 저희도 어떻게 막아보겠는데, 이번엔 좀 어려울 거 같아요.
아이 하나는 샤프펜이 손을 뚫고 나올 뻔 했으니까... 불구가 될 뻔 했던 거예요.
상민/ (끔찍해서 눈을 질끈 감고) .....
선생님/ 미안하지만 이제 종화는 더 이상...
상민/ 사과하고 배상, 얼마든지 다 할 거니까요. 그냥 반만 바꾸면 안될까요? 지금 애가 또
다른 학교로 가면 적응이 힘들어서...
선생님/ (단호하게 고개 저으며) .....
Cut to
상민, 종화의 손을 잡고 복도를 걸어간다.
선생님/ (V.O) 일반 학교는 이제 어디라도 전학이 안될 거예요. 특수 학교로 보내세요.
교실 옆을 지나쳐 가는데 아이들이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고 보며 장난스럽게 소리친다.
아이들/ 나는 바보다 -.
종화/ (따라 하며) 나는 바보다, 나는 바보다.
깔깔거리며 웃는 아이들.
애써 못들은 척 하며 앞만 보고 빠른 걸음으로 걷는 상민.
종화/ 나는 바보다, 나는 바보다, 나는 바보다...
상민/ (손으로 종화의 입을 막으며) 니가 왜 바보니. 넌 바보가 아냐.
종화/ 나는 바보다, 나는 바보다...
상민,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듯이 눈이 붉게 충혈되지만, 꾹 참고 학교를 벗어난다.
64. 상민의 집 / 저녁
식탁에 앉아있는 상민과 종화.
아줌마가 차려놓은 저녁상을 앞에 두고 있다.
종화/ 나, 계란.
상민/ 계란은 오늘 그만 먹고 밥 먹자, 종화야. 맛있는 거 많네.
종화/ 계란! 계란!
상민/ 밥 먹으면 줄게. 응?
종화, 밥그릇을 옆으로 집어 던져 버린다.
상민/ (잠시 말이 없다가) 아주머니, 계란 삶아놓은 거 주세요.
아줌마/ (걱정스럽게) 아침에도 많이 먹었는데...
상민/ 괜찮아요. 주세요.
아줌마, 냉장고 위에 숨겨두었던 삶은 계란 바구니를 내민다.
종화, 계란 하나를 얼른 집는다.
상민/ 자 봐. 엄마도 먹는다.
계란을 꾸역꾸역 입에 넣기 시작하는 상민.
입에 꽉 차도록 물고는 종화를 보고 웃는다.
목이 매이는 듯, 눈에 물이 맺힌다.
Cut to
화장실.
변기 앞에 주저앉아 먹은 것을 토해내고 있는 상민.
갑자기 눈물이 흘러내리는데... 소리는 내지 않는다.
문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
재석/ (소리) 애랑 똑같이 그러면 어떡해? 으이그 참...
65. 상민의 샾 앞 거리, 지호의 차 / 저녁
차에 앉아서 상민의 샾 쪽을 바라보는 지호.
샾의 불이 다 꺼지고 효선과 직원들이 문을 잠그며 나온다.
지호, 휴대폰을 꺼내 문자 메시지 창을 열고 고민한다.
66. 상민의 집 / 저녁
초췌한 얼굴로 침대에 누워있는 상민.
옆 방에서 재석이 종화에게 책을 읽어주는 소리가 들려온다.
재석/ (소리) 바닷가에서 두 사람의 어부가 고기잡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중 한 어부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어요. 그물이 무거워요, 굉장히 큰 고기가 걸린 것 같아요...
휴대폰에서 신호음이 울린다.
누운 채로 문자 메시지를 확인하는 상민.
‘매장 들렀는데 안계시네요. 전화 할까 하다가 혹시 바쁠지 몰라서...’
상민, 잠시 생각하다가 메시지를 지운다
67. 지호의 집 / 저녁
집으로 들어오는 지호.
부엌에서 물을 꺼내 마시고 거실 쪽으로 가는데, 어두운 복도에 그림자가 있어서 멈칫 하고
유심히 본다.
유림이 침실 앞에 굳은 듯이 서서 뭔가를 보고 있다.
지호/ ... 뭐하니?
유림,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서있다.
지호가 유림이 곁으로 다가가서 보면 바닥에 문주가 쓰러져있다.
다급하게 문주를 끌어안으며 흔들어보지만 숨소리만 작게 흘리며 의식이 없는 문주.
바닥에는 약병과 술잔이 함께 흐트러져 있다.
지호/ (휴대폰을 꺼내 누르며) 유림아, 방에 가있어, 응? (전화에) 여보세요. 119죠?
지호가 전화를 하고 있는 동안에도 유림은 그 자리에서 움직일 줄 모른다.
68. 종합 병원, 정원 / 아침
초췌한 모습으로 병원을 나서는 지호.
유림과 함께 벤치에 앉아있는 장모를 보고 다가간다.
장모/ 피곤하지? 가서 좀 자.
지호/ (곁에 앉으며) 일 나가야죠.
장모/ 퇴원하면, 당분간 내가 데리고 있을게. 유림이랑 같이.
지호/ 괜찮으시겠어요?
장모/ 그럼 어떡해. 내가 낳은 자식이니까 뒤치다꺼리 해줘야지. 유림이가 좀 싫어하겠지만.
(유림이 머리를 만지며) 우리 유림이는 지 할머니랑 말도 안해요...
지호/
.....
장모/ 자책하지 마. 처음 있는 일도 아니잖아?
지호/ 아무래도 핀란드에... 그냥 있을 걸 그랬나봐요.
장모/ 마음에 병이 있는 건데, 딴 나라 가있는다구 쉽게 낫겠어?
지호/
.....
장모/ 시간을 좀 줘봐.
지호, 벤치 반대편에 앉아있는 유림을 돌아본다.
69. 상민의 샾 / 낮에서 저녁까지
상민, 효선과 런칭 이벤트 계획서를 보며 상의를 하고 있다.
휴대폰 신호음이 울리자 기다렸다는 듯이 들어서 문자를 확인하는 상민.
하지만 문자는 스팸 광고 메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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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 모니터를 물끄러미 보고 있는 상민.
휴대폰을 집어 들고 지호의 번호를 찾는다.
전화를 할까 망설이다가 그만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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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들 퇴근하고 혼자 남아있는 상민.
하릴없이 매장 안을 걸어다니다가 가끔씩 창밖을 본다.
상민, 그런 자신이 한심하다는 생각에 쓴 웃음이 나온다.
2층 사무실로 올라가 가방을 들고 불을 끄며 나오는데 휴대폰이 울린다.
상민/ (번호 보고 반가운 표정) 네.
지호/ (E) 저예요. (하고는 시끄러운 음악 소리와 뒤섞인다)
상민/ 시끄러워서 잘 안들리거든요. (사이) 여보세요... 안들린다구요.
70. 홍대 앞 거리 / 밤
젊은 학생들을 위한 유흥 업소가 늘어서있는 거리.
상민,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걸어간다.
어느 건물 앞 계단에 한 남자가 고개를 숙이고 앉아있는데, 가까이 가보니 지호다.
상민이 앞으로 가서 서자 고개를 들고 보는 지호, 많이 취한 듯 눈이 풀려있다.
지호/ (웃으며) 오셨네요...
상민/ 왜 길에 앉아있어요?
지호/ 불쌍해 보일려구요.
상민/
.....
지호/ 불쌍해 보이죠?
상민/ 예. 많이 불쌍해 보여요. 젊은 사람들 다니는 길에서 아저씨가 이러고 있으니.
상민, 지호의 옆에 앉는다.
지호/ 어? 안챙피해요?
상민/ 어쩔 수 없죠. 서서 보고 있는 게 더 챙피하니까.
지호/ 그럼, 우리... 들어가서 한잔 할래요.
상민/ (거리를 보며) 여기도 괜찮은데요.
두 사람, 나란히 앉아 흥청거리는 거리를 바라본다.
지호/ 내가 걱정이 없어 보인다고 했죠?
상민/ (고개 끄덕) ....
지호/ 그런 척 하는 거예요. 그러지 않으면... 많이 힘드니까
상민/ 알아요.
지호/ 당신도 아프지? 나보다 훨씬 더 아픈데... 그런데 아닌 척 하잖아.
상민/
.....
지호, 눈을 감고 고개를 푹 숙인 채 말이 없어진다.
상민, 지호를 보다가 그의 무릎 위에 손을 얹는다.
고개를 드는 지호, 크게 숨을 들이쉬고는 상민을 보고 웃어보인다.
상민도 마주 보고 미소 짓는다.
71. 호텔, 베이커리 / 낮
1층의 베이커리에서 케잌과 와인을 구경하고 있는 상민.
휴대폰 진동이 울리고, 메시지를 확인한다.
‘1003’이라는 숫자가 찍혀있다.
72. 호텔, 방 / 낮
복도를 걷다가 1003호 앞에 멈춰 서는 상민.
문이 살짝 열려있다.
상민, 방으로 들어서서 창가 쪽으로 걸어간다.
어느 새 지호가 뒤로 다가와서 상민의 손을 잡는다.
서로 마주 보는 두 사람, 말없이 각자 옷을 하나씩 벗기 시작한다.
옷을 다 벗은 후, 상민에게 다가가 키스하는 지호.
얼굴에서 목으로, 그리고 가슴으로 조금씩 내려간다.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신음하다가 지호의 몸에 양 다리를 감고 아이처럼 안기는 상민.
지호, 상민을 침대에 눕히고 다시 키스하려는데, 상민이 지호를 눕히고 위로 올라간다.
자신의 성기로 지호의 성기를 애무하는 상민.
잠시 후, 지호를 몸 속 깊이 받아들이고 움직이기 시작한다.
지호가 감고 있던 눈을 떠보면 상민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
손을 뻗어 상민의 눈을 가리려는데 오히려 지호의 양 손을 잡아서 내리는 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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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사가 끝난 후.
행위를 하던 때처럼, 서로 포개져서 누워있는 두 사람.
지호/ 계속 이대로 있을 거예요?
상민/ 왜. 무거워요?
지호/ 아니.
상민/ 이렇게... 잠들었음 좋겠어요.
지호/ 자요, 그럼.
상민/ 안돼요.
상민, 지호의 목을 파고 들며 얼굴을 묻는다.
상민/ (피식, 웃으며) 내가 정말 우습게 보이겠어...
지호/ 마찬가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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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실.
욕조의 물속에 앉아있는 두 사람.
지호가 상민의 뒤에서 어깨를 어루만지고 있다.
상민/ 지금 몇 시일까? (욕실을 둘러보며) 창문이 없으니까... 지금이 낮인지 저녁인지 모르
겠네.
지호/ 핀란드처럼?
상민/
... 여기서 나가면 그 눈 덮인 숲속이 나오는 거죠.
지호/ 음... 그럼 곰도 다시 볼 수 있구.
상민/ 아, 맞다. 곰이 있었지.
지호/ 다시 생각해봐도 그땐, 정말 현실 같지 않았어.
상민/ (잠시 생각하고) 우린... 지금 우린. 현실일까?
지호/ .....
상민, 몸을 돌려 지호를 마주 본다.
지호, 손을 뻗어 상민의 얼굴을 어루만지다가 고개를 끄덕인다.
지호의 품에 안기는 상민. 아까와 달리 표정이 침울해진다.
73. 특수 학교 앞, 상민의 차 / 낮
하정이 종화의 손을 잡고 서서 기다리고 있다.
그들 앞에 급하게 멈춰 서는 상민의 차.
하정과 종화가 뒷자리에 탄다.
상민/ 미안, 미안. 많이 기다렸지?
하정/ 바쁘셨나봐요. 아까 원장님도 사모님 전화 안된다고 저한테 연락하셨었거든요.
상민/
... 그랬구나. 전화 받을 새가 없었어. (차를 출발시킨다)
하정/ 근데 머리가 왜 이렇게 젖었어요?
상민/ (당황하며) 아... 이거.
달리 할 말이 없어서 고민하는 상민, 룸 미러로 종화를 본다.
74. 지호의 집 / 저녁
부엌 테이블에 앉아있는 지호.
집 안을 둘러보는데 아무도 없어서 적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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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실.
협탁에 쌓여있는 사진들을 들어서 보는 지호.
대부분 문주가 핀란드에서 찍었던 레스토랑 사진들인데, 중간에 자신이 찍어준 문주와 유림
의 사진들이 있다.
활짝 웃고 있는 문주와는 달리 유림의 표정은 하나 같이 굳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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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림의 방.
책상에 앉아 있는 지호.
책꽂이에서 유림의 일기장을 꺼내 펼쳐본다.
대부분 평범한 일상 이야기들인데.
마지막으로 쓴 일기.
‘엄마가 많이 아프다. 그래서 나도 아프다.’
75. 상민의 집 / 밤
침실. 콘솔 거울 앞에 앉아 메이크업을 지우려고 콜드 크림 뚜껑을 여는 상민.
갑자기 멈추고 잠옷 어깨 부분을 들춰 본다.
목 아래 쪽에 붉게 키스 자국이 남아있다.
난감한 표정으로 그 부분을 살짝 만져보고 있는데 재석이 방으로 들어온다.
급히 옷을 추스르고 크림을 찍어 얼굴에 바르기 시작하는 상민.
상민/ 종화, 자요?
재석/ 응. 오늘은 얌전하네.
재석, 상민의 뒤로 다가와 서서 잠옷 사이로 손을 넣어 가슴을 만진다.
재석/ 그래도 약물 치료는 한번 생각해봐야 되겠어.
상민/ 그건... 애가 힘들까봐 안한다고 했었잖아.
재석/ 시기적으로는 할 때가 된 거야.
재석, 상민의 잠옷 단추를 풀려고 한다.
상민/ 오늘 좀 피곤하거든. 담에 하면 안될까?
재석/ 또 다음이야? 왜 그러냐, 요즘...
재석, 김 샌 듯한 표정으로 침대에 가서 털썩 눕는다.
상민, 왠지 마음에 걸려서 거울로 재석을 바라본다.
상민/ 미안.
재석/ 손으로 해 줄래?
상민/
...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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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민, 누워 있는 재석의 곁에 앉아 손으로 성기를 애무한다.
눈을 감고 조금씩 신음 소리를 내는 재석.
76. 초등 학교 앞 거리, 지호의 차 / 낮
길 가에 차를 세우고 그 앞에 서서 기다리는 지호.
유림이 학교 교문에서 나오다가 지호를 보고 멈칫 한다.
지호가 웃으며 손을 흔들자 유림이 차 쪽으로 온다.
지호/ (문을 열어주며) 잘 지냈어? 오랜만이다, 우리.
유림/
.....
Cut to
거리를 달리는 지호의 차.
늘 그렇듯 말이 없는 유림.
지호/ 어때. 할머니 집에 있으니까 좋아?
유림 (고개만 끄덕) .....
지호/ 거긴... 고양이도 있었는데. 몇 마리더라?
유림/ ... 세 마리.
뜻밖의 대답에 유림을 돌아보는 지호.
손을 뻗어 유림의 손을 살짝 잡는다.
슬그머니 손을 빼는 유림. 아직 마음을 열지 못한 듯하다.
77. 지호 장모의 집 / 낮
정원이 잘 꾸며진, 단아한 양옥집.
벽 사방에 책들이 가득 꽂혀있는 거실의 창가.
지호와 문주, 바닥에 나란히 앉아 정원을 바라본다.
정원 풀밭에선 유림이 고양이들과 놀고 있고, 장모가 뒤 쪽에 서서 웃으며 지켜본다.
문주/ 유림이가 고양이들하고는 말을 곧잘 하거든. 서로 통하는 게 있는 건가... 신기해.
지호/ (문주를 바라보며) .....
문주/ 안바뻐? 공사 현장은 어떡하구...
지호/ 괜찮아. 여기서 자고 내일 가도 돼.
문주/ 자고 간다구?
지호/ 응.
문주/ 왠일이래... 집에는 그렇게 들어오기 싫어하면서.
지호/ ...내가 언제 집에 들어가기 싫어했다구 그러냐.
문주/ (지호를 보며 미소 띤 채) 오빤, 확실히 거짓말하는 재주가 없어.
지호/ .....
문주/ (일어서서 방으로 가며) 나 졸려. 잘게.
지호, 방으로 들어가는 문주를 보다가 정원 쪽을 바라본다.
고양이와 놀고 있던 유림이와 시선이 마주 친다.
78. 호텔, 수영장 / 낮
특급 호텔의 야외 수영장.
런칭 쇼를 준비하는 스탭들이 런웨이를 설치하고 있다.
풀 사이드 테이블에 앉아 진행 상황을 보며 이야기하고 있는 상민과 상희.
상민/ 아버지 건강은, 어떠셔?
상희/ 괜찮아. 담배 끊으시고 좀 안정이 안된다고는 하시는데. 테러 땜에 뉴욕을 빨리 떠나
야 된다나, 매번 만나면 그러신다. LA는 후져서 싫고, 샌프란시스코는 지진 땜에 무
섭고. 도대체 어딜 가신다는 건지...
상민/ 여기로 오심 되겠네.
상희/ 서울? 야, 김정일이 쳐들어온다고 싫으시단다.
상민 / (웃으며) .....
무대 감독인 젊은 미국 남자가 다가와 상희의 허리를 감싸며 다정하게 얘기한다.
남자/ (영어) 리허설 시간을 한 시간 앞당기자고 하는데 어떻겠어?
상희/ (영어) 응. 알았어.
남자/ (영어) 뭐, 필요한 건 없구?
상희/ (영어) 아니... 괜찮아.
남자, 상희에게 가볍게 키스하고 돌아간다.
상민/
... 많이 어려보이는데.
상희/ 좀 어리지.
상민/ 씨리어스? (심각한 사이?)
상희/ 나야 늘 씨리어스했지, 언젠 안 그런 적 있니... 결혼을 물어보는 거라면, 글쎄. 아직
은 그게 이상한 굴레처럼 느껴져서 싫다.
상민/ .....
상희/ 너처럼 살 자신도 없고.
상민/ 나처럼 사는 게... 어떤 건데?
상희/ 잘 살잖아. 아냐? (일어서서 런웨이 쪽으로 간다) 헤이, 마이크!
테이블에 혼자 남겨진 상민.
밝은 표정으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상희와 미국 남자 친구를 바라본다.
79. 상민의 샾 앞 거리, 상민의 차 / 낮
샾 앞에 멈춰 서는 상민의 차.
직원 한 명이 나와 뒷좌석 문을 열고 박스들을 내린다.
운전석에 앉은 채 뭔가 고민하고 있는 상민.
직원/ 내리실래요? 제가 주차할게요.
상민/ 나, 잠깐 어디 좀 다녀올게. (급히 기어를 바꾸고 차를 출발시킨다)
80. 도로, 상민의 차 / 낮
운전하고 있는 상민.
신호에 멈춰 서자 휴대폰을 꺼내 지호의 번호를 찾는다.
통화 버튼을 누를까, 잠시 고민.
신호가 바뀌자 휴대폰을 그냥 내려놓고 차를 출발시킨다.
상민의 얼굴에 미소가 살짝 번진다.
81. 갤러리 공사 현장 / 낮
길 가에 차를 세우고 갤러리로 들어가는 상민, 밝은 표정이다.
한창 인테리어 작업 중인 실내.
조심스럽게 살피며 다니는 상민. 하지만 지호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세나/ (소리) 어떻게 오셨어요?
상민/ (돌아보며) 아... 김지호씨 어디 계신가요?
세나/ 김 소장, 지금 없는데. 무슨 일이세요?
상민/ (머뭇) 뭐 좀... 일 땜에 물어 볼 게 있어서요.
세나/ 오늘은 못 나올 거 같은데요. 집안 일 땜에 어디 갔거든요.
상민/ 예...
세나/ 사고가 좀 있어서... 부인이 많이 아파서요.
상민/ .....
Cut to
갤러리를 나서는 상민.
세나/ (따라나오며) 누구시라고 전해드리죠?
상민/ (당황) 제가, 제가 나중에 전화로 할게요.
상민, 차로 가서 운전석에 탄다.
상민의 뒷모습을 잠시 보고 있던 세나, 갤러리로 들어간다.
시동을 걸고 움직임 없이 멍하게 앉아있는 상민.
82. 지호 장모의 집 / 저녁 무렵
지호, 안방 문을 살짝 열고 본다.
유림이를 꼭 안은 채 침대에서 자고 있는 문주.
석양 빛이 두 사람에게로 드리우고 있다.
지호, 방안으로 들어가 침대 끝에 살짝 걸터앉는다.
잠든 문주의 얼굴이 어린 아이처럼 평온해 보인다.
손에 들고 있던 노트(유림이의 일기장)를 협탁 위에 놓는 지호.
일어서서 나가려는데 문주가 인기척을 느끼고 눈을 뜬다.
지호/ 깼어? 미안...
문주/ (누운 채로) 가는 거야?
지호/ 아니. 그냥 들어와 봤어. 잘 자나하고.
문주/ 잘 자고 있었잖아.
지호/ (잠시 문주를 바라보다가) 자는 얼굴이... 편안해보이더라.
문주/ 그래? 그래봤자... 갇혀있는 건 마찬가진데.
지호/ 왜 그렇게 생각하니. 누가 널 가뒀다구.
문주/ 아닌가? 근데 왜 난 늘 갇혀있는 거 같지...
지호/ 문주야. 만약에 말야, 만약에... 핀란드로 다시 돌아간다면...
문주/ 핀란드... (피식, 웃고) 왜 모든 게 핀란드 때문이라고 생각해?
지호/
.....
문주/ 오빠는 날 잘 안다고 생각하겠지만... 아냐.
문주, 더 이상 말을 잇지 않고 입을 굳게 다문채 눈을 감는다.
Cut to
거실로 나오는 지호.
어두운 거실에 TV를 켠 채 앉아있는 장모.
그 곁으로 다가가 앉는 지호.
두 사람, 한동안 말없이 TV 뉴스에 시선을 둔다.
장모/ 저기, 담배 가진 거 없지?
지호/ 아... 없는데요.
장모/ 끊은지 한참 됐지, 참.
지호/ 담배는 왜요?
장모/ 그냥. 요즘 좀 펴볼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 웃기지? 남편이 폐암으로 저 세상에 갔
는데 말야.
지호/ .....
장모/ 애들도 다 자는데, 그만 돌아가지 그래.
지호/ 내일 가려구요.
장모/ 있잖아, 나쁘게 듣지말구... 오늘 그냥 가고... 당분간은 오지 않았으면 해.
지호/ .....
장모/ 그냥 내 생각인데, 서로 좀 떨어져서 있는 것도 나쁘진 않을 거야. 문주가 자네를 보
면 자꾸... 쟤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해. 무슨 뜻인지 알겠지?
지호/ 그래도... 나아지지 않으면 어떡해야되죠?
장모/ 글쎄.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자구.
지호, 잠시 침묵.
장모/ (일어서며) 애들 옷 갖고 왔지?
지호/ ...현관 앞 가방에 있어요.
장모, 거실을 나간다.
Cut to
지호, 현관으로 나가다가 열려진 문 틈으로 방안을 들여다본다.
가방에서 문주와 유림의 옷을 꺼내 서랍장에 넣고 있는 장모.
장모의 어깨가 조금씩 들썩이며, 작게 흐느끼고 있다.
83. 상민의 샾 / 저녁
런칭 쇼 준비에 분주한 매장.
효선과 직원들, 박스들을 하나씩 체크하고 그 곁에서 상민이 지켜 본다.
휴대폰 소리가 울린다.
상민과 직원들 몇이 자기 전화인줄 알고 휴대폰을 동시에 꺼내든다.
그 중 한 직원이 전화를 받으며 자리를 뜬다.
상민, 휴대폰을 든 채 (그런 자신이)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이다.
84. 한적한 교외 도로, 지호의 차 / 저녁
갓길에 멈춰 서있는 지호의 차.
지호, 운전석에 깊이 기대어 앉아 도로를 오가는 차들의 불빛을 바라보고 있다.
85. 상민의 샾 / 밤
2층 사무실.
상민과 상희, 효선, 직원 몇이 보드판에 런웨이 도면을 붙여놓고 회의를 하고 있다.
책상 위의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려서 상민이 다가가 보면 지호의 번호다.
순간 갈등하는 상민, 벨소리를 꺼버리고 받지 않는다.
그런 상민을 유심히 보는 상희.
Cut to
시간 경과. 늦은 밤.
1층 구석 테이블에 모여앉아 배달시킨 중국 요리를 먹고 있는 상민과 효선, 직원들.
상민의 휴대폰이 다시 울린다.
지호의 번호임을 확인한 상민, 고민하다가 받는다.
상민/ 예.
지호/ (E) 바빠요?
상민/ 예. 좀... 바쁜데요. (자리를 피한다)
지호/ (E) 잠깐 볼 수 있어요?
상민/ 저, 내일 행사가 있어서 곤란해요.
지호/ (E) 지금 앞에 와있으니까 잠깐만 나와요.
상민, 쇼 윈도우에서 밖을 내다보면 지호가 서있다.
두 사람, 유리를 사이에 두고 통화하는 상황.
상민/ (갈등하며) .....
지호/ 보고 싶어서 왔는데.
상민/ 미안하지만, 안나갈래요.
지호/
... 왜요?
상민/ 여기 직원들도 있고... 안만나고 싶어요.
지호/
.....
상민/ 앞으로도 만나지 않는 게 좋을 거 같아요.
지호/ 왜 그러는지... 얘기는 해줘야하지 않아요?
상민/ 이만 끊을게요.
지호/ 아까 갤러리에 왔었죠?
전화를 끊어버리는 상민.
쇼 윈도우를 사이에 두고 잠시 마주 보는 두 사람.
상민, 돌아서서 안쪽으로 들어가버린다.
샾 쪽을 바라보고 서있는 지호.
86. 호텔, 리셉션 홀 & 수영장 / 저녁 무렵에서 밤까지
런칭 쇼가 있는 호텔의 행사장.
클럽 믹스 음악이 요란한 가운데 리셉션 홀에서 샴페인을 마시고 있는 사람들.
상희와 상민이 입구에 서서 손님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Cut to
소파에 앉아 손님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던 상민, 누군가를 보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입구 쪽에서 서성이고 있던 지호, 상민을 발견하고 웃어보인다.
상민, 눈치를 살피며 지호에게 다가가서 무슨 말을 할지 망설인다.
지호/ 초대장이 없어서 못들어오게 하더라구요.
상민/ (주위 시선을 의식하며) .....
지호/ 나한테 화난 이유가 뭐죠?
상민/ 화난 거 없어요.
지호/ 그럼 다행이네.
상민/ 저, 가봐야되요.
지호/ 기다릴게요.
상민, 멈칫 하고 뭐라 말하려는데 먼발치에 있는 상희와 시선이 마주 친다.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그쪽으로 걸어가는 상민.
Cut to
수영장.
런칭 쇼가 시작되고,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음악에 맞춰 런웨이를 걷고 있는 모델들.
무대 뒤편에서 진행 상황을 보고 있는 상민.
휴대폰이 진동한다.
지호의 메시지.
‘기다리고 있어요. 보고 싶어요.’
87. 호텔 앞 / 밤
행사가 끝나고, 사용했던 옷 박스들을 카니발에 싣고 있는 상민의 직원들.
트렁크를 닫으며 차에 타는 효선, 입구에 서있는 상민을 본다.
효선/ 안타세요?
상민/ 응. 먼저 가. 좀 있다가 따로 넘어갈게.
효선/ 그럼, 뒤풀이 자리에서 뵈요.
직원들이 탄 차가 떠나고 혼자 남은 상민.
휴대폰을 꺼내 문자 메시지를 확인한다.
‘1255호’
88. 호텔, 로비 / 밤
로비를 가로 질러 걸어가는 상민.
엘리베이터 쪽으로 막 꺾어지려는데.
종화/ (소리) 엄마, 엄마...
상민이 돌아보면, 재석과 종화가 걸어오고 있다.
상민/ (놀라서 말을 못하고) .....
재석/ 야, 니네 엄마 만나기 힘들다, 그치?
종화/ 엄마, 엄마.
재석/ 행사장 갔더니 벌써 나갔다더라구.
상민/
... 여긴 왜 왔어요?
재석/ 오늘따라 종화가 자꾸 찾더라구. 그래서 바람도 쐴 겸 모시러 왔지요.
상민, 내려다보면 종화가 자신의 치마 한 쪽을 꼭 잡고 몸을 비틀고 있다.
89. 거리, 재석의 차 / 밤
재석이 운전하고 있고 상민은 종화와 뒷자리에 타고 있다.
상민, 종화의 손을 잡은 채 창밖을 보고 있는데 휴대폰이 진동한다.
지호의 번호.
받지 않고 아예 전원을 꺼버리는 상민.
재석/ 왜 안받아?
상민/ 으응. 뒤풀이 자리에서. 나 안온다고 그러는 거야.
재석/ 안가도 괜찮을까... 언니가 서운해 할텐데.
상민/ 피곤해서... 그냥 쉴려구.
흔들리는 표정의 상민, 차창에 머리를 기댄다.
그녀의 얼굴 위로 네온사인들이 어른거린다.
90. 호텔, 방 / 밤
창가에 걸터앉아있는 지호.
들고 있던 휴대폰을 내려놓고 창밖을 본다.
밤거리에 수많은 차들이 오가고 있다.
91. 거리, 상민의 차 / 아침
종화를 옆자리에 태우고 운전하는 상민.
거리에 비가 내리고 있다.
상민이 돌아보면, 종화가 창밖을 유심히 보고 있다.
상민/ 종화야. 뭘 그렇게 보고 있어?
종화/ 비가 많이, 많이 와. 많이.
상민/ 그래. 비가 많이 온다. 그지?
종화/ 많이. 많이...
상민/ (창밖을 보며) .....
92. 특수 학교 앞, 상민의 차 / 아침
학교 앞에 멈춰 서서 내리는 상민.
비를 맞으며 뛰어가 조수석 문을 열어주는데 휴대폰 벨이 울린다.
상민, 휴대폰을 들어 확인도 하지 못하고 받는다.
상민/ 여보세요.
지호/ (E) 진짜 많이 기다렸어요.
상민/
.....
상민, 휴대폰을 귀에 댄 채 운전석으로 가며 학교 쪽을 본다.
우비를 입거나 우산을 쓴 아이들이 학교로 뛰어 들어가고 있는데, 종화의 모습은 어느 새
보이지 않는다.
운전석으로 들어와 문을 닫는 상민.
지호/ (E) 늦게까지 기다렸다구요.
상민/ 전 기다리라고 한 적 없어요. 왜 내가 거길 갈 거라고 생각했죠?
지호/ (E) 무슨 얘기라도 좋으니까... 만나서 듣고 싶어요.
상민/
.....
지호/ (E) 부탁이에요.
93. 공영 주차장 / 아침
넓은 주차장으로 들어서는 상민의 차.
지호가 자신의 차에서 내려 다가온다.
차를 세우고 창문을 내리는 상민.
지호/ (비를 맞으며) 자.
상민/ (시선을 피하며) .....
지호/ 이제 말해봐요. 여긴 우리밖에 없으니까.
상민/ 말할만한 것도 없어요. 그럴 필요도 없구요.
지호/ 그럼, 그동안 우린... 아무 것도 아닌 거였어요?
상민/ 우리가 뭘 더 할 수 있죠?
지호/
... 맞아요. 당신 말대로... 더 할 수 있는 일이 없을지 몰라요.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할 만한 용기도, 나한텐 없어요.
상민/ 그럼 처지가 딱한 사람끼리 만나서 위로하는 동병상련 같은 거? 아이도 그렇고, 부인
마저도 아프니까 잠깐 기댈 때가 필요했나보죠? 그런 이유로 또 부인을 배신한 거고.
아... 정말 구질구질해.
지호/
.....
상민/ 우리한텐... 선택의 여지가 없어요. 남은 일은 헤어지는 것 뿐이라구요.
지호/ 난...
그때 상민의 휴대폰 벨이 울려서 지호가 하려던 말을 끊는다.
상민/ (전화 받으며) 예. (사이) 예? (당황하며) 한 시간쯤 전에... 한시간 됐는데...
(사이) ...예.
상민, 창백한 얼굴로 전화를 끊는다.
상민/ 종화가...
94. 거리, 상민의 차 / 아침
비오는 거리를 빠르게 달려가는 상민의 차.
지호가 상민을 대신해서 운전하고, 상민은 조수석에서 통화를 하고 있다.
상민/ (흥분하여) 왜 신고를 안받아? 애가 없어진지 한 시간이 넘었는데. (사이) 분명히 학
교로 들어갔다구. (사이) 아냐, 내가 전화할게. 119로 하면 되지? (사이) 알았어.
(사이) 알았다니까.
상민, 전화를 끊고 크게 한숨을 내쉰다.
상민/ 한 시간 된 애들은 실종 신고를 안받는데요. 그게 말이 되요?
지호/ 일단 경찰하고 얘기는 했다니까, 그 사이에 우리가 찾아보자구요.
상민/
.....
지호/ 너무 걱정말아요.
상민/ 어떻게 걱정을 안해요? 종화는, 정상이 아니잖아요. 우울증 정도가 아니라구요.
언제 어떻게 다칠지 몰라서... (갑자기 울먹이는) 몰라서...
지호, 상민의 손을 잡아준다.
Cut to
특수 학교 주변을 천천히 돌고 있는 상민의 차.
두 사람, 주위를 살펴본다.
극도로 불안한 표정의 상민.
지호/ 조금 더 멀리 가봐야겠네.
상민, 발밑에 뭔가가 걸려서 보면 종화의 운동화 한 쪽이다.
상민/ (눈물이 뚝, 떨어지며) 신발도 없이...
지호/ (뭔가를 보고) 어? 저기 좀 봐요.
상민, 지호가 가리키는 방향을 본다.
아파트 단지 사이를 흐르는 작은 하천 옆 고수부지.
그 한 쪽 물가에 서있는 조그만 형체가 어렴풋이 보인다.
95. 고수부지 / 아침
상민의 차가 고수부지 주차장에 멈춰 서고.
상민과 지호가 자세히 보면, 그 형체는 우비를 입은 종화이다.
상민/ (차에서 내리며) 종화야!
종화, 상민을 돌아보고 해맑게 웃는다.
달려가서 종화를 끌어안는 상민.
지호가 종화의 신발을 들고 다가온다.
상민/ (얼굴을 만지며) 왜 여기 있어... 비 맞잖아. 가자.
종화/ (하천 쪽을 응시한 채) 떠내려 가. 막... 떠내려 간다.
상민/
...?
종화/ 떠내려 가....
상민/ (갑자기 생각난 듯 지호에게) 신발 줘 봐요.
지호가 신발을 건네주자 느닷없이 물속으로 던져버리는 상민.
무슨 영문인지 몰라 어리둥절한 지호.
뒤이어 상민이 물속으로 뛰어든다
지호/ (놀라며) 어?
상민, 물살을 헤치고 가서 자신이 던진 신발을 주워 들더니 종화를 향해 흔들어 보인다.
상민/ (활짝 웃으며) 찾았어, 종화야. 엄마가 찾았어.
종화, 신이 나서 박수를 치고... 지호는 여전히 어리둥절하다.
96. 거리, 상민의 차 / 아침
운전하고 있는 지호, 룸 미러를 본다.
온몸이 흠뻑 다 젖은 상민이 종화를 품에 꼭 안고 있다.
상민/ 예전에, 종화가 다섯 살 땐가, 유원지에 갔었는데... 징검다리 위를 지나다가 아이 신
발이 벗겨져서 물에 떠내려 가버린 거예요. 그 때 기억을 하고 있었나봐. 종화한테는
잊을 수 없는 기억이었겠죠.
지호/ (고개를 끄덕이며) .....
상민/ 누구한테나 절대로 잊을 수 없는, 그런 거.
지호/ 오늘 찾아줬잖아요. 이젠 잊어버릴 수 있겠네.
상민/ 하긴. 잊어버릴수록 좋은... 그런 기억도 있으니까.
지호/ (쓸쓸한 표정) 예. 그래요...
97. 공영 주차장 / 낮
주차장에 서있는 상민의 차.
상민, 종화가 잠든 모습을 확인하고 뒷자리에서 내린다.
지호가 다가와 우산을 받쳐준다.
상민/ (차문을 열다가) 고마웠어요. 같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지호/
.....
상민/ 아까 내가 한 말 땜에 미안하기도 하구.
지호/ 아니. 상민씨가 한 얘기 다 맞아. 사실 난... 위로 받고 싶었어요. 누구한테든.
그게 당신이어서, 많이 미안했고 부끄러웠어. 그런데,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걸 알게 되면 날 싫어하고 멀리 할까봐... 감추려고만 한 거죠.
상민/
.....
지호/ 언젠가는 오늘 같은 날이 오겠지, 하면서도... 현실 따위는 생각 안하려고 했고.
아무런 방법도 없는데... 놓치고 싶지도 않고. 지금도 할 수만 있으면, 붙들고 싶어.
... 맞아. 구질구질해. 그래도 별 상관 안해요. 당신, 너무 좋아하니까.
상민, 지호를 돌아보는데 그의 눈에 눈물이 고여 있다.
상민/ (침착해 보이려하며) 나, 마음 약해지기 전에... 가야겠다.
상민, 운전석에 타고 창문을 내린다.
두 사람, 잠시 서로의 손을 꼭 잡는다.
지호/ 만약에... 혹시 말야, 방법을 찾을 수 있다면... 나랑 함께 해줄 수 있어?
상민, 지호를 물끄러미 보다가 갑자기 눈물이 맺힌다.
급하게 숨을 고르고 대답 없이 차를 출발시키는 상민, 주차장 입구에서 잠시 멈춰 선다.
룸 미러로 멀리 서있는 지호를 잠시 본다.
순간 울음이 터질 듯하다가, 애써 감정을 추스르고 다시 액셀을 밟는다.
98. 상민의 집 / 낮
종화의 방.
하정과 도우미 아줌마가 종화에게 붙어서 옷을 갈아입히고 몸을 덥혀주는 등, 법석이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상민, 침실로 간다.
콘솔 앞에 서서 흠뻑 젖은 자신의 모습을 본다.
젖은 상의를 속옷과 함께 한꺼번에 벗으려고 하는데... 몸에 붙어서 잘 벗겨지지 않는다.
잠시 안간힘을 쓰다가 그만 두고 침대에 털썩 앉아버리는 상민.
갑자기 일어나서 현관 쪽으로 간다.
부엌을 지나다가 테이블에 앉아있는 재석을 보고 멈춰 서는 상민.
재석/ 어디, 가는 거야?
상민/ (망설이다가) 갈 데가 있어요.
재석/ 지금 들어왔잖아...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어?
상민/ 꼭 만나야 될 사람이 있거든.
재석/ 뭐야, 그 모양으로. (농담처럼) 애인이라도 있는 거야?
상민/ 응.
재석/ (표정 바뀌며) ... ?
상민/ 그 사람, 지금 만나러 가야 돼.
재석/ 너, 미쳤구나?
상민/ 당신한텐 내가 꼭 필요한 건 아니잖아. 그런데 그 사람은 지금, 내가 필요해.
재석/ (일어서며) 도대체 너...
상민/ 날 용서하지 않아도 돼. 나도 날 용서할 수 없으니까.
재석/ 이리 와서 잠깐 앉아봐.
상민/ .....
재석/ 응? 이리와 보라구.
상민/ 미안해.
상민, 밖으로 나가버린다.
99. 상민의 집 앞 / 낮
상민, 빌라에서 나와 빠른 걸음으로 차 쪽으로 간다.
재석이 그 뒤를 따라 나온다.
재석/ 이상민. 가지 마.
상민, 차에 타고 시동을 건다.
재석/ 너, 이렇게 가버리면... 돌아올 자리는 없어.
단호하게 차를 출발시키는 상민.
빌라 단지를 빠져나오며 휴대폰을 꺼내 번호를 누른다.
100. 호텔, 방 / 저녁
방으로 들어오는 지호.
어두운 방 침대에 상민이 옷을 다 벗은 채 앉아있다.
상민에게 다가간 지호, 바닥에 무릎을 꿇고 마주 본다.
잠시 말이 없는 두 사람.
지호가 상민의 허벅지에 얼굴을 묻는다.
그의 머리를 쓰다듬는 상민.
상민/ 오늘, 이렇게 같이 있었던 거로 기억하자구요. 잊고 싶어도 기억날 수 있게.
지호/ 아냐... 이런 식으로 끝낼 수는 없어.
상민/ 그래야 되. 그게 어울려. 우리한텐.
지호/ 조금만, 시간을 줘. 응?
상민/ (지호에게 키스하며) 아니. 여기까지야. 여기까지...
Cut to
상민의 안에 들어가 몸을 움직이는 지호.
두 사람 모두,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
지호, 갑자기 행위를 멈추고 고개를 떨군다.
상민/ (지호의 등을 탁, 치면서) 멈추지 말고 해야 되요. 안그러면 자꾸... 딴 생각이 나잖아.
하지만, 지호는 고개를 들지 못한다.
눈물이 뚝, 떨어지면서 상민의 가슴으로 흐른다.
상민/ 울어?
지호/
... 아니.
지호의 눈에서 다시 눈물이 떨어진다.
상민/ (지호의 머리를 품에 안으며) 어떡하냐 우리...
상민의 눈에서도 눈물이 한줄기 흐른다.
지호, 상민의 머리에서부터 키스를 하며 내려간다.
지호/ 기억하고 싶어. 당신 머리카락... 살 냄새...
두 사람, 애타게 서로의 몸을 구석구석 찾아간다.
Cut to
정사가 끝나고.
상민, 침대에 앉아 블라우스 단추를 잠그고 있다.
그 뒤에 옷을 먼저 입은 지호가 보고 있다.
상민/ 왜 그러고 있어. 빨리 가요. 인사 같은 거 하지 말고.
지호, 머뭇거리다가 천천히 밖으로 나간다.
그 뒤로 문이 닫히고...
침착한 표정이었던 상민, 참았던 울음을 터뜨린다.
그리고... 눈물이 그칠 줄 모른다.
101. 호텔, 복도 / 밤
손잡이를 잡은 채 굳어있는 지호.
방 안쪽에서 상민의 울음 소리가 새어나오고 있다.
지호, 돌아서서 복도를 걸어가다가 멈추고... 또 걸어가다가 멈추고를 반복한다.
102. 지호의 집 / 밤
초췌한 얼굴로 들어오는 지호.
지호, 주위를 둘러보다가 옥상 정원의 조명이 켜진 것을 보고 밖으로 나간다.
옥상 정원.
문주가 난간에 앉은 채 지호를 돌아본다.
지호, 말없이 다가가 옆에 앉는다.
문주/ 여기 앉아서 보는 하늘이 참 좋더라.
지호/ (하늘을 보며) .....
문주/ 난 있잖아. 날 사랑하는 사람이 필요한 거지. 간호사가 필요한 게 아냐.
지호/ (고개 끄덕이며) .....
문주/ 오빠 많이 좋아해. 너무 좋아해서... 오빠가 옆에서 날 환자로 보니까, 미워서 견딜 수
가 없었어.
지호/
... 널 환자로 보지 않아. 차라리, 내가 환자지.
문주/ 솔직히 나, 잘 할 자신 없어. 근데... 그냥 함 해볼까 해.
문주, 지호를 물끄러미 보다가 난간에 길게 눕는다.
문주/ 나, 여기 누웠다.
지호/
.....
문주/ 괜찮지?
지호/ 응.
Cut to
유림의 방.
자고 있는 유림의 곁에 다가가는 지호.
머리 맡에 일기장이 놓여있다.
일기장을 펴보는 지호.
‘엄마가 많이 아프다. 그래서 나도 아프다.’
그리고 그 밑에 쓴 문주의 답 글.
‘유림이를 아프게 해서 엄마가 미안해. 이제 안 아프도록 노력할게. 약속.’
고개를 떨군 채 일기장에 시선을 두고 있는 지호.
눈물이 일기장으로 떨어진다.
어느새 유림이 지호의 손을 잡고 있다.
유림/ 울지마요. 응?
지호, 애써 웃으며 유림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지만...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
조금씩, 더 격하게 흐느끼는 지호.
103. 상민의 집 / 밤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현관문 앞에 선 상민.
크게 한번 심호흡을 하고는 현관문의 비밀번호를 누른다.
열리지 않는다.
몇 번을 다시 눌러봐도 문은 열리지 않는다.
초인종을 누르는 상민.
대답이 없다.
상민/ 종화 아빠, 잠깐만요.
대답이 없다.
상민/ 종화만 잠깐 보고 갈게요. 응?
그래도 대답이 없자 양손으로 현관문을 두드리기 시작하는 상민.
계속 두드리고... 두드리고를 반복한다.
쾅... 쾅...
104. 상민의 샾 / 새벽
어두운 매장으로 들어오는 상희.
소파에 깊이 기대어 앉아있는 상민을 보고 다가가 옆에 앉는다.
상희/ (상민을 물끄러미 보며) .....
상민/ 여기 밖에... 갈 데가 없더라. (상희의 무릎을 베고 눕는다)
상희/ 그나마 하나 있어서 다행이구나. (상민의 머리를 만지다가) 머리랑... 옷이랑... 꼬라지
가 왜 이래?
상민/
.....
상희/ (양팔에 푸르스름한 멍자국을 보며) 꽤 격렬했나본데?
상민/ 응... 쫌 힘들었어.
상희/ .....
상민/ 언니.
상희/
... 응?
상민/ 언니도 그런 꿈 꿔? 전혀 즐거운 꿈은 아닌데... 깨어나면 아까워서 다시 잠들고 싶은
그런 꿈.
상희/ 음... (생각하다가) 있었던 거 같애.
상민/ 그렇구나... 나만 그런 건 아니네.
상민, 눈을 감는다.
상민/ 나 잘게.
상희/ 그래.
조용한 실내.
상민의 울음 소리가 조금씩 커지면서, 실내에 울려퍼진다.
O.L.
105. 상희의 호텔 방 / 낮에서 밤까지
침대에서 눈을 뜨는 상민.
창밖에서 들어오는 햇살에 눈이 부시다.
한동안 찡그린 얼굴로 창 쪽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베개에 묻어버린다.
Cut to
다시 눈을 뜨는 상민.
어두운 방 안.
몸을 일으키고 기대어 앉는다.
휴대폰을 찾아서 보는데 배터리가 나가있다.
호텔 전화기를 들고 전화를 하려지만, 번호가 생각나지 않는다.
문득 눈에 띠는, 전화기 옆의 메모.
‘넌 잘해낼 거야. 곧 돌아올게. 사랑해, 내 동생’
메모를 들어서 보다가 다시 베개에 얼굴을 묻는 상민.
깊은 한숨을 내쉰다.
106. 편의점 / 낮
휴대폰을 충전시키고 기다리는 상민.
Cut to
상민, 편의점을 나서며 휴대폰으로 전화를 건다.
상민/ 하정씨?
하정/ (E) 아, 예.
상민/ 종화 어때? 잘있지?
하정/ (E) ...네.
상민/ 있잖아, 이따가 학교로 갈게.
하정/ (E) 저기요... 안오시는 게 좋을 거 같아요.
상민/ .....?
107. 특수 학교 앞 / 낮
담당 선생과 얘기하고 있는, 상기된 표정의 상민.
상민/ 내가 엄만데, 왜 안된다는 거죠? 그런 법이 어딨어요?
선생/ 이러시면 저희도 정말 곤란해요. 아버님께서 변호사까지 보내셔서 당부하셨기 땜
에...
상민/ 저기요, 그럼 잠깐 얼굴만 보고 갈게요, 예? 그럼 됐죠? (들어가려는데)
시누이/ (소리) 언니!
상민, 돌아보면 시누이와 하정, 운전 기사가 함께 서있다.
시누이/ 뭐하는 거에요? 지금.
상민/ .....
시누이/ 언니. 부탁인데, 더 힘들게 만들지 말아요.
상민/ (말을 잇지 못하다가) 내가... 내가 엄만데...
시누이/ 그만 좀 하라니까!
안으로 들어갔던 하정이 종화를 데리고 나온다.
종화, 상민의 얼굴을 보자 환하게 웃으며 노래를 부른다.
종화/ 대출은 대출은 원캐싱....
시누이가 종화를 감싸안으며 자신의 차 쪽으로 데려간다.
상민/ 종화야...
상민, 그들의 뒤를 따라가지만 운전 기사가 막아 서서 가까이 갈 수가 없다.
상민/ (들고 있던 가방을 하정에게 주며) 여기, 구급약하고 초코렛하고 있어.
하정/ (가방을 받아들며) 예...
상민/ 약 먹는 시간 꼭 지키고... 약 먹고 꼭 초코렛 줘야 되, 응?
종화/ (차에 타면서 상민에게 손을 흔든다) 1588 빨리 십분 원 캐싱...
상민/ (따라 부르며) 대출은 원 캐싱 원 캐싱...
종화를 태운 시누이의 차가 출발하며 멀어진다.
거리에 상민이 홀로 망연자실 남겨진다.
길게 F.O.
108. 상민의 샾 / 저녁
시간 경과.
2층 사무실.
효선과 이야기를 하고 있는 상민.
효선/ ... 샌프란시스코 일정하고 시카고하고 너무 타이트 하게 붙어서 일정을 좀 조정한다
고 연락이 왔고... 음... 참, 언니 뉴욕 가는 비행기 컨펌을 다음 주 말까지 해야된다
는데.
상민/ (잠시 다른 생각에 빠져 있는 듯) ... 컨펌?
효선/ 응. 빨리 정해달라는데. 금요일일지 토요일일지. 비행기가 요즘 다 북업되서 난리래.
상민/ 그렇구나...
효선/ (상민을 멍하게 보며) ......
상민/ 어쩌지?
효선/ 그건 내가 그냥 알아서 정할게. 괜찮지?
상민/ 그래, 그럼.
효선/ 그리고... 부탁이다. 오늘 퇴근하고 우리 집으로 가자.
상민/ 왜에?
효선/ 언니, 여기서 자는 거... 한달 째야. 진짜 괜찮니?
상민/ 뭐, 괜찮은데...
효선/ (째려보며) 괜찮기는 씨...
상민/ 왜 그래?
효선/ 개주접을 떠냐... 사장만 아니면 확 한 대 까는 건데...
상민/ ......
109. 도로, 상민의 차 / 낮
휴대폰으로 통화하며 운전하고 있는 상민.
상민/ 예... 인보이스랑 세금계산서랑 같이 해서 뉴욕 가기 전에 보내드릴게요.
신호에 멈춰 서는 상민의 차.
상민/ 예. 그럼요. 잘지내죠. (사이) 와인 좋아요. 뉴욕 다녀와서 같이 하시죠. 예...
상민, 전화 끊는다.
상민/ (혼잣말로) 잘지내죠... 잘.
멍하게 전방을 주시하던 상민, 갑자기 핸들을 틀어 유턴을 한다.
그때, 지나가던 배달 오토바이와 충돌할 뻔 하며 멈춰 선다.
멈춰 서서 심한 욕을 내뱉는 오토바이 운전자.
상민, 고개를 끄덕 숙여 사과하고 다시 차를 출발시킨다.
110. 갤러리 공사 현장 / 낮
지호의 갤러리 앞에 차를 세우고 내리는 상민.
거의 마무리 완성 단계에 있는 공사 현장 모습.
상민, 갤러리 안으로 들어선다.
실내엔 인적이 없다.
천천히 둘러보고 있는 상민.
지호가 설명해줬던 대로 모든 구조물들이 들어차있다.
실내를 돌다가 정원 쪽으로 나서는 상민.
정원 한가운데에 인부들이 둥그렇게 모여 삼겹실 돌구이를 해먹고 있다.
그들 사이에 있던 세나가 상민을 보고 일어서서 다가온다.
세나/ 저기... 전에 한번 오셨었죠?
상민/ 예...
세나/ 김소장 보러 오신 거예요?
상민/ 계신가요?
세나/ 아... 모르셨구나.
상민/ 예?
세나/ 핀란드 갔어요. 지난 주에 가족들하고.
상민/ (표정 흔들리며) .....
세나/ (상민의 표정을 읽고) ...뭐, 전할 말씀이라도...
상민/ 아, 아니요. 그런 건 아니고... (하다가 갑자기 눈물이 뚝 떨어진다)
보고 있던 세나가 더 당황한다.
상민/ 수고하세요. (황급히 돌아서서 간다)
111. 상민의 샾 / 밤
어두운 2층 사무실.
간이 침대에서 잠을 청하던 상민.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일어나서 침대에 걸터앉는다.
Cut to
트레이닝 복 차림으로 1층에 내려온 상민.
적막한 샾 한 가운데 서서 멍하게 서있다가 쇼 윈도우 쪽으로 간다.
창을 통해서 어둡고, 텅 빈 거리가 보인다.
마치 지호가 나타날 것만 같다.
112. 상민의 샾 / 아침
상민, 쇼 윈도우 뒤에 서서 디스플레이를 유심히 살펴보고 있다.
상민/ (고민하며) .....
효선/ 또, 뭐가 이상한데요?
상민/ 그냥 좀... 이상해.
효선/ 디스플레이 부를게.
상민/ 아까 불렀어.
효선/
.....
Cut to
2층 사무실에 모여앉아 피자를 나눠먹고 있는 상민과 직원들.
여전히 피자가 어쩌고 저쩌고 하며 수다를 떨고 있다.
113. 특수 학교, 놀이터 / 낮
미끄럼틀을 반복해서 타고 있는 종화.
그 옆 벤치에 앉아 종화를 보고 있는 상민과 하정.
상민/ 어느 쪽으로 가는데? 파리?
하정/ 파리가 아니구요. 루앙이라구, 노르망디 쪽에 있어요.
상민/ 와, 멋지겠다. 그런 곳에서 공부를 한다니...
하정/ 파리에 비하면 완전 시골이에요.
상민/ 어쨌든 정말 잘됐다.
하정/ 잘되긴요, 고생만 할 거 같은데...
상민/ 이별 선물이라도 해줘야겠네. 뭐 필요해?
하정/ (상민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며) .....
상민/ 응? 괜찮으니까 말해봐.
하정/ ...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지내실 거예요?
상민/ 음... 글쎄. (씁쓸하게 웃으며) 잘 모르겠어.
하정, 갑자기 고개를 떨구고 흐느끼기 시작한다.
상민/ 어? 왜 그래...
하정/ 저 때문에 이렇게 된 거 아니죠? ...아니었음 좋겠어요.
상민/ ...?
하정/ (흐느끼며) 사모님 핀란드 가셨을 때요... 그때 뿐이었어요...
상민/ .....
하정/ 제 탓도 있어요. 원장님 잘못만은 아니에요.
하정, 고개를 숙인 채 계속 훌쩍인다.
잠시 생각하던 상민, 무슨 얘기인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다가 깔깔 거리고 웃는다.
울고 있던 하정,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상민을 바라본다.
한참을 웃고 있던 상민, 갑자기 웃음을 멈추고 종화를 유심히 바라본다.
종화, 바닥에 주저앉아서 뭔가를 입에 넣고 있다.
상민/ 어? 쟤 모래 먹는다, 모래.
하정, 울다말고 벌떡 일어나서 종화에게 헐레벌떡 뛰어간다.
114. 인천 공항 / 아침
체크 인 카운터 앞에서 항공사 직원과 이야기하고 있는 상민.
뉴욕 행 보딩 패스를 받아들고 게이트로 걸어간다.
게이트 앞에 잠시 서서 출도착 현황을 알리는 전광판을 올려다본다.
그렇게 전광판을 바라본 채, 굳은 듯이 서있는 상민.
115. 핀란드, 오울루, 국제 학교 앞 / 낮
눈이 쌓여있는 학교 전경.
유림이 학교 앞에 서서 기다리고 있다.
잠시 후 SUV 한대가 그 앞에 멈춰 서고, 유림이 달려가서 탄다.
길 건너편에 서있는 택시.
뒷자리에 앉아서 보고 있는 상민.
룸 미러로 상민을 보는, 핀란드 여자 택시 기사.
택시 기사/ (영어) 저 차예요?
116. 오울루, 택시 / 낮
지호의 차를 따라 한적한 길을 달려가는 택시.
상민의 시선으로, 하얗게 눈 쌓인 풍경들이 차창밖에 스쳐 지나간다.
택시 기사/ (영어) 혹시... 형사나 탐정, 뭐 그런 일을 하세요?
상민/ (영어) ... 그런 셈이죠.
택시 기사/ (영어) 흐음... 멋지네요.
117. 오울루, 레스토랑 / 낮
택시가 주차장으로 들어서며 멈춰 선다.
차에서 내린 상민, 눈을 밟으며 레스토랑 쪽으로 걸어간다.
창가에 서서 안쪽을 들여다보는 상민.
한 쪽 테이블에 지호와 문주, 유림이 앉아서 메뉴를 보고 있다.
모두들 밝고, 행복해 보이는 표정.
상민, 레스토랑 입구로 들어서는데 웨이트리스가 다가온다.
웨이트리스/ (핀란드어) 어서오세요.
상민/ (망설이는) (핀란드어) ... 화장실이 어디죠?
Cut to
화장실.
세면대의 물을 틀어놓은 채 잠시 서있는 상민.
비장한 표정으로 물을 잠그고는 밖으로 나간다.
복도를 걸어가는데 반대편에서 유림이 걸어온다.
멈칫, 하는 상민.
유림도 상민을 보고 멈춰 선다.
유림/
... 안녕하세요.
상민/ (당황하며) 아, 안녕.
유림, 상민의 옆을 지나쳐 화장실로 들어간다.
잠시 그 자리에 굳어있던 상민, 카운터를 지나쳐 그냥 밖으로 나온다.
Cut to
화장실에서 나온 유림, 테이블로 돌아가서 지호의 옆에 앉는다.
문주가 웨이트리스에게 어설픈 핀란드어로 음식 주문을 하고 있다.
유림, 지호의 귀에 대고 뭐라고 속삭인다.
지호, 유림의 말을 듣고 급히 창밖을 내다보면, 레스토랑 앞에 서있는 여자(상민)의 뒷모습
이 보인다.
표정이 흔들리는 지호.
문주/ (메뉴판에 시선을 둔 채) 오빤, 음료수 뭐할래?
지호, 문주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한동안 굳은 모습으로 서있던 상민, 체념한 듯이 고개를 떨군다.
천천히 택시 쪽으로 걸어가는 상민, 잠시 멈추고 다시 레스토랑 쪽을 돌아본다.
지호 가족의 모습이 창너머로 어렴풋이 보인다.
문주/ 오빠?
지호/ (핀란드어) ... 따뜻한 커피.
지호, 다시 창밖을 보면 (상민이 탄) 택시가 주차장을 벗어나고 있다.
일어설까 말까... 고민하는 지호.
그때, 문주의 손이 지호의 팔에 얹힌다
문주/ 더 시킬 거 없어?
지호/ .....
애써 태연한 척 하려는 지호, 눈가에 물기가 어려 있다.
그런 지호의 표정을 유림이 바라본다.
118. 오울루, 택시 / 낮
하얗게 눈이 쌓인 숲 길을 달려가는 택시.
창 밖의 풍경을 응시하며 말이 없는 상민.
택시 기사/ (룸 미러로 상민을 흘깃 보며) (영어) 이제 어디로 가요?
상민/ .....
택시 기사/ (영어) 예?
상민/ (흔들리는 목소리) (영어) 그냥... 계속 가죠.
택시 기사/ .....
119. 오울루, 레스토랑 앞 / 낮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 지호와 문주, 유림.
차에 올라탄다.
지호, 시동을 걸고 차를 출발시킨다.
그의 차가 가는 방향은 상민의 차가 향한 쪽과 같다.
문주/ (의아한 표정) 오빠, 왜 이쪽으로 가?
지호/ ...응?
문주/ 반대 방향이잖아.
지호/ (당황) 아참...
하지만 차를 돌리지 않고 계속 가는 지호.
문주/ 안돌릴 거야?
지호/ ...돌려야지.
지호의 시선으로, 차 한 대도 보이지 않는 텅 빈 도로만이 보인다.
차를 갓길에 멈춰 세우는 지호.
비상등을 켜고 룸미러로 주위를 살핀다.
하지만 차를 돌릴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문주, 그런 지호를 바라본다.
지호의 표정이 흔들리고 있음을 보는 문주.
문주/ ...괜찮아?
지호/ (눈시울이 붉어진 채 태연한 척) 그러엄.
천천히 차를 유턴 시켜서 반대 방향으로 되돌아가는 지호.
하지만 그의 시선은 룸 미러에 비친, 점점 멀어져가는, 그가 가려고 했던 길을 향하고 있다.
120. 오울루, 한적한 길 / 낮
상민, 어딘가를 응시하며 서있다.
쿠사모 부근에서 보았던 침엽수림과 흡사한 숲.
눈이 조금씩 내리기 시작한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눈을 맞는 상민.
휴대폰 벨 소리.
상민/ (전화 받으며) 네.
재석/ (E) 나야.
상민/ (뜻밖이라는 듯) ... 오랜만이네.
재석/ (E) 뉴욕 갔다며?
상민/ ... 으응.
재석/ (E) 언제 와?
상민/ 며칠 있다가.
재석/ (E) 그래... 와서 한번 보자.
상민/ .....
재석/ (E) 저기, 종화 바꿔줄게.
종화/ (E) 치티치티 뱅뱅, 치티치티 뱅뱅....
상민/ ......
종화/ (E) 엄마. 엄마 해봐. 치티치티 뱅뱅.
상민, 종화의 목소리를 들으며 침엽수림 쪽을 바라본다.
상민/ 그래... (눈이 젖어오며) 나도 사랑해... 사랑해.
상민, 전화를 끊고 택시 앞으로 걸어온다.
차에 기대 선 채 담배를 피우던 택시 기사, 상민을 돌아본다.
택시 기사/ (담배 갑을 내밀며)(영어) 피울래요?
상민이 담배 한 개비를 받고, 기사가 지포 라이터로 불을 붙여준다.
나란히 서서 담배를 피우는 상민과 택시 기사.
상민/ (영어) 지금... 몇시죠?
택시 기사/ (영어) 시계가 없어서... 잠깐만요. (차문을 열려는데)
상민/ (영어) 아, 아니요. 괜찮아요.
택시 기사/ ... ?
상민/ (영어) 몰라도 돼요.
택시 기사/ .....
상민 / 모르는 게... 더 좋아요.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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