ㅇ ㅗ ㄹ ㄷ ㅡ ㅂ ㅗ ㅇ l
20030107 v2.0
1. 비행기 (저녁)
검푸른 화면에 크레딧. 東進하는 비행기에서 본 풍경 - 깜깜한 하늘 멀리 조금씩, 붉어지기 시작한다. 보이스 오버 나레이션 시작된다. 책을 읽듯 억양 없이 단조로운 톤이다.
대수
(소리)
....이 얘기를 왜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하는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나한테 벌어진 그 끔찍한 일을 떠올리려고 할 적마다
왠지 그 구름부터 생각이 난다.
지상의 것이 아닌 빛깔이 어둠 속에 번져나가더니 어느덧 찬란한 햇살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크레딧, 끝난다. 이제까지 비행기 창을 통해 내다보던 카메라, 천천히 후진한다. 창가 자리에 앉은 대수가 모습을 드러낸다. 아름다운 공연이 끝나 아쉽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쉬는 대수, 맥주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신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탈탈 털어 넣는다. 무심코 옆자리를 돌아본다. 아직도 목을 빼고 밖을 내다보는 백인 아가씨, 눈길이 마주친다.
대수
(서툴어도 자신 있는 영어)
감옥이 따로 없죠?
(동의한다는 듯 씩 웃자)
난 비행기 탈 때 빼놓고는 절대 10시간 이상 한 장소에 있는 법이 없거든요?
마리아
여행 좋아하시나 보죠?
대수
(씨익 웃으며)
여행사 직원인 걸요....
(갑자기 악수를 청하며)
대니얼 오입니다.
마리아
(맞잡으며)
마리아 콘치타 피구에라스예요.
대수
(지나가는 스튜어디스를 불러 세워, 맥주 캔과 컵을 들어 보이고)
....스페인하고 서울은, 직항이 없어서 좀 불편하죠.?
마리아
몇 나라나 다녀보셨어요?
대수
한 40개국쯤? 어려서부터 점쟁이들이, 어디 한군데 눌러 살지 못한다고 했대요.
그런 신세를 한국인들은 ‘역과 역 사이를 달리는 말의 운명’이라고 부르죠.
그래서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바로 여행사에 취직했어요.
....쎄비야, 시내에 사세요?
마리아
(눈이 휘둥그레져)
어떻게 알았죠, 거기서 온 거?
대수, 새로 도착한 맥주를 따서 두 컵에 나눠 따른 다음 마리아에게 하나를 건넨다.
대수
(씩 웃더니, 맥주를 꿀꺽꿀꺽 마시고 나서)
....아까 입국신고서 쓰시는 걸 잠깐 훔쳐봤거든요.
마리아
그럼, 호텔 이름도 보셨겠네요?
대수
(음흉한 표정으로)
더 좋으면서 값도 싼 호텔을 소개해 드릴 용의가 있습니다만....
마리아
사실은 저도 당신을 좀 훔쳐봤어요.
어떤 사진을 아주 열심히 들여다보시던 걸요?
대수
(굳어지는 얼굴, 그러나 이내 멋쩍게 웃고는 지갑에서 사진을 꺼내 건네며)
이거 말입니까?
마리아
정말 예쁜 아내와 딸이네요!
(손가락으로 짚으며)
....몇 살이죠?
대수
세 살....하도 집을 자주 비워서 아빠 얼굴도 잘 못 알아봐요.
작년엔 한 달만에 들어가서 안아주니까
자기 아빠는 전화기 안에 있다면서 수화기 붙들고 아빠 불러달라고 막 울고 그랬어요.
마리아
(웃으며)
....가서 딸한테 자랑하세요.
매력적인 스페인 여성의 유혹을 받았지만 일언지하에 거절했다고.
머쓱해진 대수, 잔을 들어 단숨에 비워버린다. 손도 안 댄 맥주를 대수 테이블에 옮겨놓는 마리아, 손에 든 책을 다시 펼친다. 대수, 그 잔을 들어 또 한 모금. 다시 맥주를 주문하려는 순간 덜컹, 컵 안의 맥주가 출렁대기 시작한다.
스튜어디스
(방송)
지금 저희 비행기는 기류 변화가 심한 곳을 통과하고 있사오니
승객 여러분께서는 좌석 벨트를....
대수 얼굴의 클로즈업 - 상하좌우로 심하게 요동치며 치밀어 오르는 구역질을 억지로 참는다.
대수
(소리)
....‘구름 위를 걷듯이 편안하다’는 구두 광고가 있지만, 천만에....
구름 위는 몹시 불안하다.
2. 공항 (밤)
디졸브되면, 콘베이어에 실려 빙빙 돌아가는 수하물들. 넓은 홀 한 구석에서 공중전화로 통화중인 대수.
대수
....이럴 때 택시 좀 타보자, 야....아니, 버스 타는 건 괜찮은데, 내려서 한참 걸어야 돼잖어.
....아, 알았어, 알었어. 하여튼 갈 테니까, 밑에 깨끗이 씻구 기다려라이....뭐? 으하하하!
(멀리 트롤리를 밀고 나가는 마리아를 발견하고 크게 손을 흔들어 보이며)
....윤이 껀 샀는데....응? 날개야, 천사 날갠데, 오린지 거윈지, 뭐 그런 애들 깃털루 만들어 가지구
고무줄로 이렇게 어깨에 걸치는 거거덩?
....아냐, 졸라 이뻐! 니 꺼? 기다려라, 기다려. 가서 보여준다니까?
....야, 넌 빨리 가서 뒷물이나 하구, 윤이 좀 바꿔봐....빨리!
3. 공항 앞 (밤)
자동문 열린다. 대수, 밖에 나서기가 무섭게 담배부터 꺼내 문다. 프랑스제 [골루와즈]. 한 모금 깊이 빨아들인다.
대수
(현기증을 느끼고)
....으으으.....
멍해지는 눈동자, 휘청휘청 비틀거리다 벤치에 주저앉는다.
대수
(소리)
....천 구백 팔십 팔 년 오월 이십 칠 일이었다....
4. 버스 정류장 (밤)
공중전화 부스. 트렁크를 옆에 놓고 선 대수, 큰 소리로 통화중이다. 버스 기다리는 사람들, 자꾸 힐끔거린다.
대수
....말 좀 끊지 마바....그래서 내가 그랬지. “내가 [몽마르뜨르 호텔] 묵는 거 어떻게 알았냐?”
그러니까 아, 이년이 내가 입국신고서 쓰는 걸 훔쳐봤다구 그러는 거 있지? 와- 완전 선수대....
....이쁘대니까! 뭐? ....아- 새끼, 속구만 살었나....진짜래니까!
....하여튼 들어봐, 그래가지구 딱 [샤를르 드골]에 내리지 않았겠냐?
어, 버스 왔다! 주환아, 나중에 전화할 테니까 일단 끊자....끊어...
서둘러 끊고, 트렁크를 끌며 달려가는 대수.
5. 골목 (밤)
가로등으로 환히 밝혀진 골목. 검게 썬팅된 승용차 2대가 나란히 들어와 선다. 작업복 차림의 사내들이 하나둘씩 내린다. 하나같이 심드렁한 얼굴들이다.
6. 버스 (밤)
자리에 앉아 꾸벅꾸벅 조는 대수, 삐삐가 울리자 얼른 꺼내 확인한다.
대수
(혼잣말로)
....아- 새끼....
다시 졸기 시작한다. 다음 정류장에서 사람들이 타고 내린다. 졸린 눈으로 할머니를 발견한 대수, 재빨리 일어난다.
대수
앉으세요, 할머니.
할머니
고맙습니다, 선생님.
대수
댁이 어디세요?
할머니
(귀에 손을 대며)
응?
대수
(엄청나게 큰 소리로)
댁이 어디시냐구요!
승객들, 다 쳐다본다.
할머니
장충동이지.
대수
어?
(다시 고함)
할머니, 이 차 이거 장충동 안 가!
이십이번이 아니구요, 이십이 다시 일 번 타셔야돼요!
(괜히 두리번거리며, 혼잣말로)
아- 클났네, 이거!
7. 골목 (밤)
작업복 사내들, 가로등 기둥에 달린 뚜껑을 뜯어 열고 퓨즈를 절단한다. 연달아 3개의 가로등이 차례로 꺼진다. 길게 난 길의 한쪽 끝이 컴컴해진다.
8. 대로변 (밤)
버스에서 내리는 대수, 또 가까운 공중전화 부스에 들어가 버튼을 누른다.
대수
....주환이냐? ....새꺄, 백마 따먹은 얘기가 그렇게 궁금하드냐?
하여튼 떡 얘기라면 그저....
다시 수다를 시작하는 대수. 그의 음성이 차츰 줄어든다.
대수
(소리)
....물론 지금의 나는 그렇게 말이 많지 않다....
9. 골목 (밤)
가로등이 꺼져 어두운 골목의 끝에 주차된 자동차. 차안의 사내1, 탈지면이 든 비닐 봉투에 클로로포름을 붓는다. 반대편 밝은 길을 응시하며 조용히 대기하는 사내들.
10. 거리 (밤)
밝은 길. 트렁크를 끌고 가볍게 콧노래를 부르며 걸어오는 대수, 우뚝 선다.
대수의 시점 - 동네 건달들이 길을 막고 서서 저희끼리 시시덕대는 중이다. 난감해 하는 대수.
위에서 본 광경 - 건달들이 막고 있는 인도에서 내려서는 대수, 차들이 쌩쌩 달리는 차도를 무단횡단한다. 마구 떠들며 놀던 건달들, 조용히 주목한다. 겨우 건넌 다음, 중앙선 따라 위태롭게 걷다가 다시 무단횡단. 결국 디귿자 모양으로 우회해서, 건달들 앞을 안 지나치고 무사히 길을 간다.
11. 골목 초입 (밤)
또 콧노래 부르며 걸어오는 대수. 골목에 들어서는 순간, 컴컴한 반대편을 보고 잠깐 멈춰 선다. 잠깐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이내 특유의 낙천적인 표정으로 돌아와, 다시 걷기 시작한다.
대수
(소리)
너한테 꼭 충고하고 싶은 게 있다.
어느 날 갑자기, 집 앞 골목에 가로등이 세 개 이상 꺼져있다면
절대로 거기 들어서지 말아라.
트렁크를 끌며 멀어지는 뒷모습, 콧노래 소리가 줄어들며 완전히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페이드 아웃.
12. 감금방 (밤)
눈을 뜨는 대수, 일어나 앉는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만져본다. 허름한 호텔처럼 꾸며진 8평 남짓한 독방. 난색 계통의 벽지와 침대 시트, 커튼과 카펫....다들 두껍고 꺼칠꺼칠하다. 벽에 걸린 액자 2개. 활짝 웃는 광대 얼굴을, 두꺼운 붓질의 유화로 그린 이발소 그림, 거기 적힌 싯귀, ‘웃어라, 온 세상이 너와 함께 웃을 것이다. 울어라, 너 혼자 울 것이다.’ 방금 그려낸 듯 생생한 색채. 또 하나는, 무릎 꿇고 앉아 기도하는 소녀와 ‘오늘도 무사히’. 14인치 텔레비전, 작은 탁자와 의자. 욕실에는 변기와 세면대, 작은 욕조. 철문 맞은편에 난, 단 하나의 창, 그러나 유리 너머는 또다시 벽으로 막혀있다. 그 벽에는 꼭 아파트 모델하우스처럼, 알 수 없는 외국 어느 도시의 풍경 사진이 벽지처럼 붙었다. 각종 램프들이 천장, 벽, 탁자 위, 침대 옆 등 여기저기 많다. 대수,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면으로 지어진 주황색 수의를 걸치고, 검정 가죽 스니커즈를 신었다. 문고리를 돌려보지만 꿈쩍도 않는다.
대수
(문을 두드리며)
이봐요. 이봐요! 밖에 누구 없어요? 사람이 갇혔어요, 이봐요!
대답 없다. 미친 듯 두드리며 계속 소리지르다 지친 대수, 무너지듯 주저앉아 머리를 문에 기댄다. 문짝에 닿은 귀에, 발자국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다시 기운을 내 문에 매달린다.
대수
(고함)
여기요, 문 고장났거든요?! ....여보세요?! ....이거 좀 열어주세요!
저기요....아- 이거 어떻게 된 거야....?
(혼잣말까지 하다가, 점점 가까워지던 발소리가 문 앞에서 멈추는 듯하자, 더욱 힘을 내)
이 호텔 이름이 모에요? 저는 오대수거든요?! 프론트에 물어....
갑자기 철컹,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희색이 돈다. 그러나 기다려봐도 문은 열리지 않는다. 어리둥절해 하던 대수, 또 무슨 소리를 듣고 내려다보면 자기 다리 사이로 양은 쟁반이 들어오고 있다. 재빨리 엎드리는 그의 코앞에서 음식 투입구의 문이 철컹, 닫힌다. 발소리 벌써 멀어진다. 쟁반에는 중국식 군만두 한 접시와 초간장과 단무지 종지, 쇠젓가락, 사과 한 알, 그리고 생수 한 병.
13. 복도 (밤)
감금방이 늘어선 복도, 전혀 호텔 같지 않아 보인다. 대수가 절규하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린다. 간수 둘이 좌우열을 각각 맡아 배식중이다. 카메라 후진하면서 좌우 여기저기서 새로운 목소리들이 하나둘씩 추가되어 간다. 투입구가 열릴 때마다 잘 들렸다가 닫히면 확 줄어든다. 여러 수감자들의 고함, 절규, 울음이 온통 뒤섞여 웅성대는 소리가 기나긴 복도를 가득 메운다.
14. 골목 (새벽)
길 한복판에 버려진 대수의 트렁크. 조깅하는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힐끔 돌아보기도 한다.
15. 감금방
바닥 앵글로, 배식구 클로즈업. 뚜벅뚜벅 소리가 가까워지더니 간수의 구둣발이 프레임 인한다. 아주 익숙한 동작으로 발만 이용해 자물쇠를 밀어 올리고 미닫이문을 열면, 옆으로 누워 구멍에 바싹 붙어 있는 대수 얼굴 클로즈업, 수염과 머리가 조금 자랐다. 배식구 열리기가 무섭게 떠들어대기 시작하는 대수.
대수
(친한 척 과장된 웃음 띤 얼굴로, 아주 빠르게)
아씨, 아씨....얘기 좀 해요, 에?
나, 내보내 달라구 안 하께....근데 여기가 어디야, 응?
어딘지나 알구 갇혀있어야지, 사람이 이게 뭐야, 안 그래요?
여기, 뭐 하는 데에요?
....그거 안 가르쳐 주나? 그럼 아씨, 나 언제까지 있어야 되는데?
(간수의 발, 군만두 쟁반을 밀어 넣는다. 대수 얼굴, 접시에 밀려 물러나면서도 계속 물어댄다.
잽싸게 쟁반을 치워놓고 다시 구멍에 얼굴을 갖다대는 대수)
....한 달, 한 달? 두....
(간수의 발, 미닫이문을 밀어 닫는다. 갑자기 작아졌지만 계속되는 소리)
....달?
간수의 발, 사라진다. 굴하지 않고 끝없이 이어지는, “그럼....다섯 달? ....아씨, 어디 가....에이- 아씨, 나하구 얘기 좀 해....좋아좋아, 그럼 일 년?” 그 위에, 대수의 나레이션이 겹쳐 들린다.
대수
(소리)
그 때 그들이 내게, ‘십 오 년’이라고 말해 줬다면
조금이라도 견디기가 쉬워졌을까? ....아니었을까?
바닥이 음식찌꺼기와 오물들로 어지럽다. 철제 침대 위에 쪼그리고 앉은 대수, 머리와 수염이 덥수룩하게 길었다. 저만치 배식구가 열리고 새 쟁반이 들어와도 돌아보지도 않는다.
대수
(소리)
....아무도 못 만났다.
벽에 붙은 파이프에서 쉭쉭 소리를 내며 흰 개스가 뿜어져 나온다. 냄새를 맡아본다. 방이 금새 뿌옇게 된다. 일제히 불이 꺼지고 가짜 창에 붙은 사진에는 반대로 불이 켜진다. 개스가 차오면서 풍경은 안개 낀 도시가 되어간다.
천장등 켜지는 모습이 어렴풋이 보인다. 개스가 천장으로 빨려 올라가면서 시야가 트이면, 바닥에 쓰러져 자는 대수. 문 열리는 소리, 남자들 들어온다. 페이드 아웃.
대수
(소리)
가끔 누군가 들어오기는 했지만 그건 항상
밸리움 개스로 날 잠재운 다음이었다.
대수, 깨어난다. 무성의하게나마 짧게 잘린 머리와 수염. 둘러보면, 어지럽던 주변이 깨끗이 정리되어 있다.
대수
(소리)
나를 가둔 놈은, 내가 그토록 돌아다니기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나한테는 감금이 죽음보다 더 큰 형벌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형벌....무슨 죄에 대한 형벌일까.
광대 그림을 유심히 들여다보던 대수, 얼굴 근육을 억지로 움직여 어색하게 웃음을 지어본다.
머리와 수염이 도로 자랐다. 탁자 앞에 앉은 대수. 스프링 공책 한 권과 볼펜 한 자루를 내려다본다.
대수, 잔다. 철문 열리고 간수들 입장. 수술용 고무장갑 낀 손으로 대수의 컵을 들어 비닐 백에 넣는다. 주사기로 피를 뽑는다.
군만두를 입에 넣고 우물우물 씹는다. 신경질적으로 채널을 돌리다가 뉴스에 고정. 피가 흥건한 집안이 보인다.
기자
(소리)
가정주부가 참혹하게 살해된 채 집안에서 발견돼 경찰이 수사에 나섰습니다.
살해된 김자현씨는 목에 깊은 자상을 입은 채 발견되었는데....
(만두를 입에 가득 문 채 뚫어져라 화면을 보는 대수, 눈에 핏발이 서며 눈물이 고이며)
경찰은 잔혹한 살해 수법과 집안에 패물 등 귀중품들이 그대로 있는 점으로 미루어
원한에 의한 살인일 가능성이 많은 것으로 보고
이년 전 사라진 남편 오대수씨를 긴급 수배했습니다.
경찰은 김자현씨의 몸과 집안에서 발견된 오씨의 혈흔을 증거로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소매를 걷어 살펴보면, 팔뚝에 남은 주사바늘 자국. 자세히 들여다보는 동안
혈관이 꿈틀거리면서 무언가가 안에서 움직이더니, 주사 구멍을 통해
개미 한 마리가 살갗을 비집고 나온다. 손가락을 퉁겨서 개미를 날려버리는 대수)
....또한, 살해현장에 남겨진 컵에서, 실종된 오씨의 생생한 지문이 발견됨으로써
오씨가 최근 부인을 방문한 사실이 확인되었다고 경찰측 소식통은 전했습니다.
(다시 자국을 주시하면서 기다려보는 대수, 더 이상 개미는 나오지 않는다.
게다가 유일한 도난품이 가족 사진 앨범이라는 점도 그런 추측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대수가 쓰던 컵이며 대수의 증명사진 따위를 보여주는 텔레비전 화면. 대수 놀라는 소리, 비명이 들리기 시작하면 180도 패닝. 침대에 앉아 발버둥치는 대수의 그림자가 비치는 벽을 지나, 머리가 온통 개미로 덮인 실물 대수까지.
대수
(소리)
분명히 말해두거니와, 나는 지금도 내가 멀쩡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텔레비전 화면. 아내 피살 뉴스가 끝나고 다음 뉴스. 텔레비전 앞에 웅크린 대수, 한참 가만히 있다가 고개 들면 눈물로 얼룩진 얼굴. 억지로 미소를 만드는 대수.
대수
(소리)
웃어라, 온 세상이 너와 함께 웃을 것이다.
울어라, 너 혼자만 울게 될 것이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다. 한심한 몰골의 대수, 멍한 눈으로 텔레비전만 본다.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20세 연하의 건축 노동자와 결혼했다는 소식을 전하는 뉴스.
대수
(소리)
그녀의 여덟 번째 결혼을 기념하기 위해 조촐한 행사를 준비했다.
거울을 노려보며 타월로 주먹을 감싼다.
깨진 거울 아래 누운 대수. 끊긴 동맥에서 흘러나온 피. 철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사내들이 들어와, 발을 잡아끌고 나간다.
광대 그림 클로즈업, 시간의 흐름을 이기지 못하고 물감이 갈라져 미세한 금이 그물처럼 갔다. 비대해진 몸집과 초점 없는 눈동자의 대수. 목에 붙은, 보이지 않는 개미를 손가락으로 툭툭 퉁겨낸다.
탁자 위에 놓인 공책과 볼펜을 내려다본다.
잠자리에서 일어나는 대수, 실내 풍경에 뭔가 변화가 있음을 눈치채고 이리저리 살펴본다. 텔레비전 아래 처음 보는 기계가 놓였음을 발견한다. 케이블 TV 수신장치. 새 리모트 컨트롤러를 들고 눌러본다.
대수
(소리)
네가 만약 어쩔 수 없이, 가로등 세 개 꺼진 골목에 발을 들여놓게 됐을 경우
텔레비전과 친해지기를 권하고 싶다.
([초밥의 세계], [도청 - 당신의 사생활이 위험하다!] 따위의 각종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보며)
그 바보상자가 당신을 교양인으로 만들어줄 수도 있다.
매일 열 일곱 시간씩 집중해서 본다면 말이다.
텔레비전은 학교고, 집이고, 교회며, 친구고, 스승이고, 애인이다.
텔레비전 화면, 넬슨 만델라 30년만의 석방.
탁자 앞에 앉은 대수, 공책의 백지를 가만히 내려다본다.
볼펜을 들어 쓰기 시작하는 대수.
대수
(소리)
....그는 내가 스스로 인생을 돌이켜보기를 권하고 있다.
(깨알같은 글씨로 가득한 페이지를 넘기고, 또 쓰기 시작하며)
....누구와 싸웠던 일, 누군가를 괴롭히고 상처 줬던 일들을 적기 시작했다.
(마지막 장까지 채운 공책을 덮고 새 공책을 펼치며)
말할 수 없이 부끄러워졌다....너무나 평범한 인생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내 ‘악행의 자서전’이었다.
모든 이들에게 미안했다....하지만 이중에 나를 가두고 아내를 죽인 놈이 있다.
(또 열심히 쓰며)
무언가 내게서 피해 받은 게 있어서 그랬겠지만....따라서 미안하지만....
그래도 그는 너무했다.
공책 스프링을 뽑아 끝을 날카롭게 가는 대수.
바닥에 앉은 대수의 등으로 카메라 다가간다. 스프링 끝에 볼펜 잉크를 묻힌 다음 팔뚝 피부에 찌른다. 고통스런 신음.
팔굽혀펴기 하는 대수. 시간 경과하면서, 완만하던 몸놀림이 빨라지고 팔뚝에 새겨 넣은 문신도 늘어난다. 살도 빠진다.
만두를 먹다 갑자기 멈추는 대수, 음식 쟁반 귀퉁이에 쇠젓가락 한 짝이 더 있다. 집어들고 들여다본다.
침대를 밀어놓고 젓가락으로 벽을 긁는 대수, 퀭한 얼굴로 집요하다.
텔레비전 화면. 서태지의 [난 알아요], 천안문 사태 등이 이어진다. 틈틈이, 목사가 열변을 토하는 설교 방송과 각종 케이블 채널의 강습 프로그램도 끼여든다. 영어, 일어, 컴퓨터, 사진, 바디 빌딩, 그리고 복싱.
대수
(소리)
여긴 감옥이 아니다. 여긴 학교다, 여긴 학교다, 학교다.
언젠간 졸업한다, 졸업한다....
펜으로 벽지에 지름 5mm 정도의 검은 점을 그린다. 의자에 앉아 벽을 응시한다.
왼팔을 짚고 엎드린 대수, 오른손으로 페니스를 쥐고 허리를 움직인다. 운동 같기도 하고 자위행위 같기도 하다.
권투시합 중계방송을 본다. 흑인 복서가 상대를 사정없이 몰아 부친다. 보면서 동작을 따라하는 대수.
회칠이 벗겨지고 붉은 벽돌이 나온다. 벽돌 사이 모르타르를 파내기 시작하는 대수.
텔레비전을 들고 팔운동하는 대수.
텔레비전 화면. 걸프전 보도.
자기 글을 읽는 대수.
대수
(소리)
아무리 생각해도, 이 정도로 나를 증오할 만한 사람은 찾을 수 없었다.
도대체 누가....왜....
찾아야 한다, 기억해 내야 한다....
신경질적으로 공책을 던져버린다. 이미 바닥에 버려진 6권위에 툭 떨어진다.
벽을 응시하는 대수, 점이 점점 커지기 시작한다.
성수대교, 삼풍백화점 붕괴....
침대 끝에 앉은 대수, 왼팔로는 존재하지 않는 여인을 끌어안고 오른손으로 마스터베이션한다. 페니스는 가만히 잡고만 있고 매트리스의 반동을 이용해 몸을 출렁거리는 방식이다. 자극이 부족한지, 왼손으로 자기 허벅지를 탁탁 쳐댄다. 여인의 둔부가 부딪히는 소리가 난다. 교성의 환청까지 들리기 시작한다.
공개수배 프로그램. 형도의 얼굴을 화면 가득 띄워놓고 그의 혐의 사실을 전하는 진행자.
진행자
....그는 여성들에게 접근해, 전생을 알려주겠다면서 최면을 겁니다.
우울증이나 불면증을 치료해준다고 하기도 합니다.
피해자들은 그의 신사적인 태도와 심리학 교수라는 거짓말에
그만 방심하고 최면을 허락했습니다.
그리곤 몸을 허락하거나 통장 비밀번호를 알려주고, 그 기억조차 지워졌습니다.
....[공개수배 24시], 오늘은 연쇄강간 및 사기 용의자 유형도를 수배합니다.
침대에 누운 대수. 텔레비전에서 애국가가 흘러나온다. 조용히 철문 열리는 소리. 대수에게 다가가는 발걸음. 멈춰선 형도, 대수를 잠시 내려다본다. 인기척에 간신히 눈을 조금 뜨는 대수, 몸을 움직이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 형도, 대수의 귀에 입을 바짝 갖다대고 속삭이기 시작한다.
형도
....지금 당신은 구름 위에 누워 있습니다.
천사의 날개처럼 하얀, 솜털 구름이 끝없이 펼쳐진 들판입니다....
어렵사리 고개 돌려, 아래 펼쳐진 구름을 본다. 다시 고개 돌리면, 어슴푸레 자신을 향해 웃는 형도의 흐릿한 얼굴.
형도
셋을 세면 당신은 기분 좋게 구름을 뚫고 지상으로 내려갑니다.
....하나, 둘, 셋
페이드 아웃.
4면의 모르타르를 다 긁어내는 데 성공한다. 벽돌 한 장이 움직인다. 안간힘을 써 뽑아낸다. 벽에 구멍이 뻥 뚫렸다.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이제 그 위 벽돌의 주위를 긁기 시작한다.
[장학퀴즈]가 방송중이다.
진행자
자- 이제 ‘서양음악사’ 스피드 퀴즈! 열 개의 문제를 삼십 초안에 맞춰야 합니다.
(초침 돌아가는 소리 시작되면서)
....오페라 [돈 지오바니]의 작곡자는?
대수, 무표정하게 소리 안 내고 입 모양으로만, ‘모차르트’.
학생
모차르트!
맞췄다는 띵똥 소리.
진행자
바하의 [무반주 파르티타와 소나타]는 어떤 악기를 위한 곡?
대수, 무표정하게 소리 안 내고 입 모양으로만, ‘바이올린’.
학생
첼로!
틀렸다는 땡 소리. 대수, 무표정하게 소리 안 내고 입 모양으로만, ‘벼엉신’.
벽지에 등신대로 그려놓은 사람의 윤곽선. 신체 곳곳의 급소들을 점으로 표시해 놓았다. 머리, 손, 발을 다 이용해서 들이받고 때리고 차는 훈련.
대수
(소리)
필요한 게 체력만은 아니다.
탈출하고 나서 세상에 적응하기 위해....
섹스하는 대수의 시점 - 앞에 엎드린 여인의 허리와 엉덩이가 앞뒤로 움직인다. 엉덩이에 얹은 자기 손도 보인다.
벽에 비친 그림자 - 혼자 무릎 꿇고 서서 허리를 움직이며 마스터베이션하는 대수, 왼손으로 상상 속 여인의 엉덩이를 찰싹찰싹 때리는 시늉까지.
대수
(소리)
....정말 필요한 건 상상력이었다.
디졸브되면, 역시 벽에 비친 그림자 - 혼자 복싱하는 대수, 글자 그대로 ‘섀도우 복싱’이다.
핸드 헬드에 의한 대수의 시점 - 흑인 복서가 공격해 온다. 대수의 펀치가 날아가 작렬한다. 흑인, 다운되면서 프레임 아웃. 다른 복서가 프레임 인, 새로운 경기가 시작된다. 상대 복서, 일방적으로 얻어맞는다.
텔레비전 화면. IMF위기, 김대중 당선, 부시 취임식, 9.11 테러사건....
침대를 밀어놓고 모르타르를 제거하고 살짝 얹어놓기만 한 벽돌을 빼내는 대수. 이제 벽돌 5개가 쑥쑥 빠져나온다. 6번째 벽돌의 작업을 시작한다. 쇠젓가락 길이가 반으로 줄었다.
대수
(소리)
하나 남았다, 하나만 더 빼내면 나갈 수 있다....
구석에 쪼그리고 앉은 대수. 팔뚝에 문신을 새겨 넣는다. 전과 달리 고통을 즐기듯 실실 웃기까지 하는 대수. 이제는 푸른 빗금으로 가득 찬 팔뚝.
등신대로 그려놓은 사람. 급소들만 골라 놀라운 속도로 가격하는 대수.
벽을 본다. 시점 - 콩알만했던 점이, 점점 커지기 시작한다. 대수의 어깨너머로 보이는 벽면, 검은 원이 번져나간다. 완벽한 검정 벽을 배경으로 앉은 뒷모습. 카메라 후진하면서, 감금방은 사라지고 광막한 암흑으로 빨려들 듯 점점 작아지는 대수. 무한처럼 보이는 순수한 검정 속에서 결국 대수는 흰 점이 되어버린다.
6번째 벽돌도 이게 거의 다 되어간다. 흥분되어 미친 듯이 손을 놀린다. 파이프에서 개스가 나오자 아쉽다는 듯 한숨을 쉬고 정리를 한다. 침대를 제자리에 끌어다 놓고 눕는다.
대수
(소리)
급할 건 없다. 하루쯤이야....그렇게 오래 기다렸는데....
소매를 걷어 팔뚝에 새겨진 14개의 빗금 문신을 본다. 이제는 여기저기 물감이 벗겨지기까지 해 더욱 고독해 보이는 노송도, 개스가 뿌옇게 짙어지며 뒤덮어 버린다.
개스 다 빠져나갔을 즈음, 조용히 철문 열리는 소리. 대수에게 다가가는 형도, 그의 귀에 입을 바짝 갖다대고 속삭이기 시작한다.
형도
....지금 당신은 구름 위에 누워 있습니다.
천사의 날개처럼 하얀, 솜털 구름이 끝없이 펼쳐진 들판입니다....
어렵사리 고개를 돌리는 대수, 아래 펼쳐진 구름을 본다.
16. 옥상 (낮)
천천히 흐르는 구름들 - 바닥에 푸른 하늘과 흰 구름이 그려진 건물 옥상을 수직 부감으로 트래킹하면서 생기는 착시 현상이다. 트래킹 끝에, 여행용 대형 트렁크가 프레임 인된다. 늦은 오후의 햇살 아래, 어린이 놀이터, 목제 운동 기구와 배드민턴 코트 따위가 설치된 옥상 풍경, 평화롭다. 가방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한다. 기우뚱거리다 쓰러지는 트렁크. 안에서 텅텅 소리가 울려나온다. 결국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열리더니 대수가 모습을 드러낸다. 잠시 어리둥절해 있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납치될 때 입었던 옷 그대로다. 눈이 부셔 어쩔 줄을 몰라한다. 눈물을 철철 흘리면서, 저린 팔다리를 펴보는 대수, 옥상 난간에 한 다리를 걸친 채 엉거주춤 선 사내와 눈이 마주친다. 바닥에는 빈 소주병과 얌전히 벗어놓은 구두 한 켤레. 잠시 침묵이 흐른다.
자살남
(떨리는 음성으로)
....나 말리지 마!
(다가가는 대수, 코를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는다. 당황하는 사내.
이번에는 뺨을 쓰다듬어 본다. 사내의 손을 끌어당겨 자기 뺨을 쓰다듬게 한다.
눈이 부셔 흘러내린 눈물이 사내 손을 적신다. 둘, 사랑하는 사이 같아 보인다.
사내, 마음이 약해지면서 덩달아 눈시울이 젖어)
....말리지 말래니깐....요....
(대꾸가 없자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며)
아저씨....내가요, 아무리 짐승만두 못한 놈이어두요, 녜?
살 권리는 있는 거 아닌가요, 녜?
대수
(사내 코앞에서 똑바로 바라보며)
아저씨....내가요, 아무리 짐승만두 못한 놈이어두요, 녜?
살 권리는 있는 거 아닌가요, 녜?
자살남
(당황해서)
....네?
자기 목소리가 신기하게 들리는 듯, 또 한번 중얼거려보는 대수, 옥상 끝으로 가 내려다본다. 삭막한 아파트 숲 풍경. 바람에 날리는 머리칼, 여전히 흐르는 눈물.
대수
(소리)
납치됐던 바로 그 골목이었다. 그 자리에 아파트가 들어섰다.
그렇다고 옥상에 던져놓다니....꽤나 고지식한 놈들인가 보다.
대수, 옥탑 문을 열고 계단을 내려간다. 여전히 옥상 난간에 한 다리를 걸친 채 엉거주춤 서서 바라보는 사내.
자살남
(울먹이며 절규)
....녜?!!
17. 엘리베이터 (낮)
요란한 기계음과 함께 문이 닫힌다. 요란한 디자인의 베르사체 선글라스를 퍼머 머리에 찔러 쓴 아줌마의, 겁먹은 얼굴. 그 옆에 선 대수, 하강이 시작되자마자 구석에 서서 양팔로 두 벽을 짚고 앙버티며 진땀을 흘린다.
18. 아파트 앞 (낮)
부인용 베르사체를 쓰고 건물을 나서는 대수. 그 뒤로, 경비 아저씨한테 뭐라고 소리치며 자꾸 대수 쪽을 손가락질하는 아줌마. 성큼성큼 걷는 대수와 경비실 사이로 자살남이 떨어진다. 엄청난 파열음과 함께, 주차된 자동차 지붕이 푹 꺼진다. 아줌마의 비명이 귀를 찢을 듯 울린다. 돌아보지도 않고 걷는 대수, 뒤를 따르기 시작하는 회색 밴.
대수
(소리)
웃어라, 온 세상이 너와 함께 웃을 것이다.
울어라, 너 혼자만 울게 될 것이다.
선글라스 아래로는 아직도 눈물이 흐르는데, 억지 미소를 얼굴 가득 지으며 길을 가는 대수.
19. 다른 아파트 앞 (낮)
지은 지 얼마 안 돼 보이는 아파트 앞에 서서 올려다보는 대수.
대수
(소리)
....거기서 오 분 떨어진 우리 집도 없어졌다. 어딜 가나 온통 아파트뿐이었다.
....친구나 친척집에 전화를 할 수도 없다.
나는 아내를 살해하고 달아난 사람이니까, 나는 도망자니까....
20. 번화가 (저녁)
좁은 골목을 나서는 대수, 갑자기 번화가가 펼쳐진다. 바삐 걷는 인파 속에 혼자만 서 있다. 엄청난 소음과 휘황찬란한 네온싸인들. 양손으로 귀를 막고 선 대수.
21. 뒷골목 (밤)
고개 푹 숙이고 빨리 걷는 대수, 무심코 앞을 보더니 우뚝 선다.
대수의 시점 - 동네 건달들이 길을 막고 옹기종기 서서 저희끼리 시시덕대는 중이다.
부감 앵글 - 건달들을 바라보고 섰던 대수, 다시 길을 간다.
고개 푹 숙이고 빨리 걸으며 건달들 앞을 지나쳤다가 급정거하더니 다시 오는 대수. 한 녀석 입에 물린 담배를 쏙 뽑더니 깊이 빨아들인다.
대수
(현기증을 느끼고)
....으으으.....
풀썩 주저앉아 콜록거리면서도 다시 한 모금. 기막혀하는 건달들, 서로의 얼빠진 얼굴들을 번갈아 본다.
담배 건달
(먼저 정신을 차리고)
....이 씨방새!
냅다 발길질을 하는 건달. 머리를 걷어 채인 대수, 나뒹구는 듯했지만 바닥을 몇 바퀴 구르더니 담벼락에 튕기면서 몸을 날린다.
대수
(소리)
....십 년 동안의 상상훈련, 과연 실전에 쓸모가 있을까....
한 놈의 복부를 정수리로 들이받고 쓰러뜨린 뒤 본격적인 격투를 시작한다. 대수에 비해 건달들의 몸놀림이 비현실적으로 느리게 느껴진다. 슬로우 모션으로 움직이는 놈들 사이를, 입에 담배를 문 채로 재빠르게 누비는 대수.
대수
(소리)
....있다.
잠깐 사이에 싸움 끝난다. 이마에 흐르는 피를 쓱 닦고 한 모금 더 피우려는데 어디선가 전화벨소리 들린다. 바닥에 누워 신음하던 건달들 서로 마주본다.
대수
(나직이)
....전화는 받아라.
자기 전화기들을 꺼내보지만 다 아니다. 건달들, 일제히 대수를 쳐다본다. 시선을 의식하고 귀를 기울여보는 대수, 소리가 자기 몸에서 나고 있음을 깨닫는다. 저고리 안주머니에서 휴대전화기를 꺼내들고 영문 몰라하던 대수, 조심스레 폴더를 열어 귀에 댄다. 건달들, 주목한다.
대수
여보세요?
(한참 기다려도 대답이 없자, 침착하게)
....누구냐....날 왜 가뒀나?
우진
(소리)
누굴 것 같습니까?
대수
....조능연인가.
우진
(소리)
아니요.
대수
이소영이 시켰나.
우진
(소리)
아니요.
대수
유흥삼?
우진
(소리)
다른 사람....
대수
이종용?
(대답 없자)
....강창석? ....황주연? ....김나성? ....박진우?
(책 보고 읽듯이 줄줄이 나오는 이름들)
임덕윤? 방혜원? 이재평? 박도성? 권명환? 오승철?
우진
(소리)
으음....또?
대수
(고함)
누구야, 도대체 너 누구야!
우진
(소리)
그래, 먼저 누군지 알아내요. 그 다음엔 왜 그랬는지도 알아내구요.
그게 숙제예요. 잘 생각해 봐요, 인생을 통째로 복습하는 거야.
학교에서 나왔으니까 이제 숙제를 할 차례잖아, 안 그래요?
....명심해요. 모래알이든 바위덩어리든, 물에 가라앉기는 마찬가지예요.
전화 끊어진다. 멍청히 섰던 대수, 다시 담배를 피우려고 하지만 이미 필터까지 다 타버렸다. 전화기를 집어넣다가 주머니에서 다른 뭔가를 꺼내든다. 지갑과 라이터, [골루와즈] 담배. 지갑에는, 신분증이나 처자식 사진, 크레디트 카드 따위는 다 없어지고, 대신 백만 원 짜리 수표만 두둑하게 들었다. 담배갑에 그려진 날개 달린 투구를 잠시 들여다보던 대수, 하나 꺼내 피워 문다. 이내 얼굴을 찡그리며 담배를 떨구고 발로 비벼 끈다. 현기증에 휘청하면서 침까지 뱉는다. 비틀거리면서 골목 깊숙이 걸어가는 대수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건달들.
담배 건달
(얻어맞은 눈두덩을 문지르며)
씨방새, 담배 있으면서....
22. 번화가 (밤)
휘적휘적 사람들 사이를 헤치며 어디론가 가는 대수의 발.
대수
(소리)
....누구냐....왜 날 가뒀나....
....누구냐....왜 날 가뒀나....
....누구냐....왜 날 가뒀나....
찰칵, 대수의 모습 카메라에 잡힌다.
23. [아키라] 앞 (밤)
[明 AKIRA]라고 적힌 일식집 간판. 커다란 어항을 들여다보는 대수. 천천히 움직이는 물고기들, 바닥에 깔린 자갈과 모래.
대수
(소리)
....모래알이든 바위덩어리든, 가라앉기는 마찬가지야.
....모래알이든 바위덩어리든, 가라앉기는 마찬가지야.
대수와 카메라 사이를 지나가는 회색 밴.
24. [아키라] (밤)
진한 화장에 퍼머 머리를 한 미도, 손에는 회칼을 들었다.
미도
(당황한 듯)
네?
아직도 선글라스를 낀 채로 바에 앉은 대수, 이마에 흐르는 피. 다른 손님은 거의 없다.
대수
살아있는 것이 먹고 싶다고 했다.
미도
(어색하게 웃어보이며)
아- 네....
잠시 후 -
꼬물거리는 산낙지가 놓인 접시. 젓가락에 말아서 통째로 입에 넣는 대수.
미도
(친한 척)
오랜만이시네요?
대수
(한 입 가득 든 낙지를 우물우물 씹으며)
처음 왔다.
미도
(갸우뚱)
이상하다, 굉장히 낯이 익은데....어디서 뵀죠?
대수
티비에서 봤다.
미도
(반색하며)
아- 탤런트라서 밤에두 그런 거 끼구 댕기는구나?
대수
(난데없이)
전국일주, 세계일주 - 요리왕을 찾아라!
....에스비에스 매주 목요일 저녁 여섯 시 삼십 분.
한국 최초의 여자 일식 요리사.
미도
(겸연쩍어 하며)
아- 그거요?
시청률 별루라더니 보는 사람 많네....?
아직 보존데요, 뭐.
대수
여자는 손이 차서 스시를 만들 수 없다.
여자 일식 요리사가 없는 이유다.
또 한 마리가 입에 들어간다.
미도
우와, 별 걸 다 아시네....?
저는 돌연변인가 봐요, 손이 굉장히 뜨겁거든요?
팔을 뻗어 대수의 손을 만지는 미도. 당황하는 대수, 가만히 손을 잡은 채 그의 눈을 들여다보는 미도.
대수
(어지러운 듯 눈을 감으며)
....차갑다.
미도
(손을 떼며)
뜨거워....스시를 쥐면 익어버리겠어요.
(이마를 짚어보더니 눈이 휘둥그레져서)
....손님!
대수, 무너지듯 탁자에 엎어진다. 급히 바를 돌아 홀 쪽으로 달려나오는 미도.
대수
(소리)
....널 처음 보는 순간부터 갑자기 열이 나고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미도
(몸을 흔들며)
....손님! 아저씨!
대수 입에서 산낙지 발 하나가 삐져나와 꾸물거린다.
대수
(소리)
....왜 그랬는지는....
25. 미도의 집 (밤-아침)
아주 좁은 아파트 거실. 두꺼운 이불을 두르고 앉은 대수, 긴 나레이션을 마무리한다.
대수
....나도 모르겠다.
옷도 못 갈아입은 미도, 마주 앉아 이야기를 경청한다. 미도가 자기 말을 믿고 있는지, 눈치를 살피는 대수.
미도
(빤히 바라보다가 대뜸)
....다 뻥이죠?
대수
아니다.
미도
그렇게 아저씨가 미웠다면, 그냥 죽여버리지 왜 가두기만 했을까요?
대수
모르겠다.
미도
죽이기 싫어서 가두기만 했다면, 왜 죽을 때까지 가둬두지 않았을까요?
대수
모른다.
미도
왜 하필이면 십 오 년만 가둬뒀을까요?
대수
....관두자.
미도, 대수 겨드랑이에 끼워놓은 체온계를 뺀다.
미도
(눈금을 읽으며)
....벌써 많이 내렸어요, 해열제 잘 듣네?
(대답 없이 물끄러미 자신을 바라보는 대수. 미도, 당황해서)
....왜요?
대수
....너....내 말을 믿는 것처럼 보인다.
미도
뻥이었어요?
대수
아니다.
미도
그래도 그건 뻥이죠?
대수
뭐가?
미도
....날 첨 본 순간부터 열 나고 어지러웠단 거.
대수
....십 오 년 만에 나와서 그렇다,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에 면역이 없어서.
미도
아니, 그게 아니라....
(화제를 돌리려고)
....말투가 원래 그래요?
대수
변했다, 오랫동안 머릿속으로만 얘기를 해왔으니까.
미도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더니, 말투를 흉내내며)
나는 씻고 자야 한다.
침실로 가는 미도. 혼자 남은 대수,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버려진 해열제 포장지를 주워 들여다본다. 무표정하던 얼굴에 경악의 빛이 떠오른다. 회칼을 들고 나오는 미도.
미도
(화장실을 가리키며)
문고리가 고장나서 안 잠기거든요? 음흉한 생각하지 마요.
(칼을 들어 보이며)
사시미 떠지는 수가 있으니까.
대수
(포장지를 보여주며)
이게....
미도
(흘낏 보더니)
좌약이에요, 기절한 사람한테 약을 먹일 수가 있어야지.
들어가 버리는 미도. 포장지를 든 채 고개를 푹 숙이는 대수. 빠른 페이드 아웃.
이튿날 -
검은 화면에 미도 목소리.
미도
아저씨, 일어나요....아저씨!
(눈을 뜨자)
가게에서 복지리 좀 훔쳐다놨어요, 좀 먹어요.
가발 벗고 화장 지운 미도의 얼굴은 놀랍도록 어려 보인다. 창 밖이 훤하다.
대수
....누구시죠?
미도
미도예요, 미도.
나 보면 열 나고 어지럽달 땐 언제고, 인제 알아보지두 못하네?
대수
(일어나 앉으며)
....몇 살이냐, 도대체?
미도
(픽 웃으며)
여자에, 어리기까지 하면 손님들이 인정을 안 해준다구 그래서
화장두 하구 가발두 쓰구 그래요.
(일어서는 대수를 올려다보며)
안 먹어요?
26. [청룡]1 (아침)
한산한 중국집 실내 풍경. 음식을 기다리는 대수와 미도.
미도
거기서 군만두만 먹었다면서요?
(대답 없자 답답해져서)
근데 나오자마자 또 먹어?
대수
재워준 건 고맙다만 내 일엔 끼여들지 말아라.
미도
내가 왜 집까지 데려간 줄 알아요?
(잠자코, 이어지는 이야기를 기다리는 대수)
....난 궁금한 건 못 참거든요? 아저씨가 잘 모르는 모양인데....
‘얼굴에 상처 난 미남 아저씨가 아줌마 선글라스를 끼고
혼자 와서는 국어책 낭독 말투로 산낙지를 주문하더니 픽 쓰러졌다.’
이거, 엄청나게 호기심을 일으키는 사건이에요.
게다가 그 남자가 한다는 소리가....
대수
(말을 끊으며)
....음식에서 찢어진 전표조각을 발견했다.
미도
네?
27. 회상 - 감금방
군만두를 씹던 대수, 만두속에서 뭔가를 발견했는지 손가락으로 집어낸다. 자세히 보면 찢어진 전표조각. 앞뒤로 찢어진 채 [청룡]이란 글자만 남았다.
대수
(소리)
열 군데 건 백 군데 건 상관없다, 십 오 년 먹은 맛을 잊을 수야 없지.
28. [청룡]2 (아침)
다른 집이다. 주문한 군만두 그릇이 놓여지면 하나 집어 입에 넣는다. 뚫어지게 바라보는 미도. 경건한 모습들이, 무슨 의식 같다. 찰칵, 사진 찍힌다.
미도
(다급해서)
어때요, 어때요? 맞아요?
대수
(째려보며)
아직 씹지두 않았다.
미도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어때요? 그 맛이에요?
잠자코 탁자에 돈을 놓더니 일어서 나가는 대수. 서둘러 따라나가는 미도.
29. [청룡]3 앞 (낮)
회색 밴이 카메라 앞을 지나가고 나면 고급 중국집 외경, [청룡]이라 적힌 간판. 대수와 미도가 풀죽은 꼴로 나온다.
30. [청룡]4 (저녁)
우물우물 씹는 대수. 탁자에 턱을 괴고 지켜보는 미도. 메모지에 가득 적힌 [청룡]들의 주소와 전화번호. 모두 줄을 죽죽 그어놓았다. 대수, 마지막 하나에 또 줄을 긋는다.
미도
(짐짓 걱정스레)
....인제 어떡하죠?
대수
다른 쪽으로 접근해야지.
미도
다른 쪽, 어디? 예를 들면....군만두가 아니라, 물만두쪽?
푸하하하!
혼자 웃어대다가 대수의 심각한 표정을 보고 입을 다무는 미도.
대수
....날 미워했을 만한 사람들이 몇 있다.
미도
(고개를 끄덕거리다가 갑자기 갸우뚱)
살인용의자라면서 어떻게 찾아가려구 그래요? 신고하면 어떡해?
대수
내가 안 가면 된다.
미도
....그럼 누가 가?
31. 사장실 (낮)
으리으리한 집무실. 가발 쓰고 화장한 미도, 노트와 펜을 들고 앉아 받아쓰기한다. 맞은편에는 사장.
사장
(자신 있는 태도)
글세....기자 양반이 이해를 할랑가 모르겠지만....사실 난 그 친구가 되려 고맙다니까?
요즘두 가끔 생각해요, 그때 그 회사에서 안 짤렸으면 지금 어떻게 됐을까?
동기 놈 때문에 회사 짤릴 땐 정말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었지만
그게 바로 내 인생에서....
32. 미도의 집 (낮)
미도
(노트를 읽으며)
....전화위복의 계기가 된 게 아니냐....
그러니까 역설적인 의미에서 오대수의 고자질이 내 인생을 구한 게 아니냐....
....근데 그 씨발 새끼 아직두 안 잡혔습니까?
(흉내를 마치고)
....그러던데요?
당황한 대수의 표정을 살피는 미도.
미도
(손뼉을 탁 치며 애써 힘차게)
....자, 다음 후보는 누구죠?
(대답 없는 대수에게)
....누구 또 고자질한 사람 없어요?
쏘아보는 대수, 실수했다는 듯 혀를 쏙 내미는 미도.
33. 성당 묘지 (저녁)
노을지는 묘지의 쓸쓸한 풍경. 어느 묘 앞에 선 대수와 미도와 늙은 수녀. 십자가 모양 묘비에 타원형 사진이 박혀 있다. 중년 수녀의 흑백사진. 또 누군가 사진 찍는다.
수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더니)
....결국 그 바람둥이 사내를 잊지 못하고, 시름시름 앓다가 그만....
미도
(귀엣말로 대수에게)
....아저씨, 진짜 나쁜 놈이야....
몸둘 바를 몰라하는 대수.
34. 구멍가게 (낮)
중년여인, 서랍을 뒤진다.
아줌마
오 년쯤 전에 국제전화가 왔었어요, 아빠 나타났냐구....
....한국 말, 많이 까먹었드라. 양부모가 둘 다 의사라는 거 같던데....
묵은 다이어리 갈피에서, 아무렇게나 찢어낸 누런 종이 조각을 찾아 건네는 아줌마.
미도
애 엄만 어디 묻혔는지....?
아줌마
가까운 사이두 아니구....워낙 친척이 없으니깐 그냥 우리가....
보시다시피 우리두 사는 게 이 모냥이니, 원....장사 치루구 한 번두 못 가봤지, 뭐.
쯧쯧쯧....냄편이라구, 어디서 그런 짐승을 만나가지구....
35. [아키라] (밤)
주방에서 일하는 차림의 미도, 주소가 적힌 누런 종이 조각을 건넨다.
미도
앞에 건 딸아이 주소구요, 뒤에 묘지 약도 그려왔어요.
손님처럼 바 앞에 앉은 대수, 받아 들여다본다. ‘Eva von Ljungberg'이란 이름과 스톡홀름의 주소, 전화번호가 적혔다. 대수, 금새 눈물이 글썽글썽해진다.
미도
전화 걸어볼래요?
(어깨를 들썩이며 소리 죽여 울기 시작하는 대수를 측은히 바라보다)
....내가 걸어줄까요?
푹 수그린 채 세게 고개를 젓는 대수. 안타깝게 바라보는 미도. 잠시 후 울음을 그친 대수, 갑자기 온통 눈물로 덮인 얼굴을 드는데, 고개 숙이고 있을 때 이미 만들어둔 미소가 만면하다.
대수
(미소를 고정시킨 채)
....아니....그 새끼 잡아죽인 다음에.
미도
아서요....살인을 아무나 하나?
산 생선에 칼 대는 것두 처음엔 얼마나 힘든데....
36. 공원묘지 (낮)
삽을 든 관리 직원과 함께, 헐떡이며 산 중턱을 올라오는 대수. 무너진 흙과 드러난 바위들, 봉분은 새것들만 띄엄띄엄 보일 뿐이다.
직원
(심드렁하게)
작년 장마가 해방이래 최악 아니었습니까.
바루 찾으러 오신 분들만 그냥저냥 겨우 수습했지, 뭐 다른 이들은....
이 언저리 어디껜데....
삽을 뺐어 들고 땅 파기 시작하는 대수. 슬쩍 자리를 피해 내려가는 직원. 닥치는 대로 몇 삽 파다 말고 멈추는 대수, 우두커니 서서 먼 산이나 본다. 갑자기 삽을 빙빙 돌리더니 냅다 던져버린다. 멀리 대수가 개미처럼 조그맣게 보이는 위치, 카메라 바로 앞으로 삽이 뚝 떨어져 박히면서 흙에 묻혔던 사람의 팔뼈가 쑥 솟구친다. 앙상한 손가락뼈 사이로 대수가 보인다.
37. 모란시장 (낮)
사람들로 가득한 시장통을 걷던 대수, 개 파는 가게 앞에 서서 자기 보고 짖는 똥개 한 마리를 가만히 내려다본다.
38. 들판 (저녁)
노을지는 벌판, 바람이 분다. 강아지 등을 자기 가슴에 닿게 안고 선 대수. 칼을 꺼내 강아지 목에 댄다. 낑낑거리며 칼 쥔 손등을 핥는 강아지. 차마 바로 보지 못하고 눈을 들어 먼 산을 보는 대수. 서산에 지는 해. 시점 쇼트인 듯싶었으나, 갑자기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아래로부터 쑥 프레임 인하는 손. 역광을 받으며 부르르 떠는 칼에서 피가 뚝뚝 듣는다.
39. 미도의 집 (밤)
세탁기 클로즈업 - 전면에 난 원형 창으로, 분홍빛 물 속에서 신나게 돌아가는 흰 와이셔츠 보인다.
거실. 컴퓨터 앞에 앉은 미도, 텔레비전 앞에 전화번호부를 펼쳐놓고 앉은 대수.
미도
(모니터 보며)
....아저씨두 아이디 하나 만들어줄까요?
대꾸 없이 전화번호부만 뒤지는 대수.
미도
좋아하는 영화나 노래 있어요?
돌아보면 여전히 전화번호부 뒤적이는 대수. 미도가 던진 인형이 머리에 맞고 툭 떨어진다. 꿈쩍도 않고 전화번호부의 어느 페이지만 뚫어지게 본다.
컴퓨터 모니터. 에버그린/ 어디 간 거예요? 누구랑 얘기 하나보죠?
미도
(중얼거리며 타이핑)
아저씨랑 얘기했어요.
(에버그린/ 아저씨? 대니얼?)
대니얼? 누구야, 그게?
(돌아보는 대수. 미도, 중얼거리며 타이핑)
여기 그런 사람 없어요.
어느새 다가온 대수, 컴퓨터 모니터 들여다본다. 에버그린/ 잘 있었나요, 오대수씨? .....‘더 넓은 감옥’에서의 삶은 안녕하신지....? 당황하는 대수의 표정을 보고 상황을 짐작한 미도, 자판을 쳐서 ‘왜 15년이죠?’를 입력시킨다. 에버그린/ 그야 물론....당신의 활기찬 중년 성생활을 위해서죠.
대수
(미도에게)
농담은 사절....당신은 어디 있지?
그대로 자판에 옮기는 미도. 에버그린/ 아주 높은 탑에 갇힌 외로운 왕자랍니다. 나를 잊지 말아 주세요, 사시미 공주님....^_^. 에버그린, 채팅창에서 사라지고 접속이 끊긴다.
대수
에버그린이 누구냐.
미도
몰라요, 그냥 채팅하다 만난 사람이야.
(얼빠진 사람처럼)
....근데 아저씨가 여기 있는 걸 어떻게 알았지?
대수, 앉았던 자리로 가서 전화번호부 한 장을 죽 찢더니 조각을 주머니에 넣고 현관으로 간다.
미도
어디 가요, 오밤중에?
대수
(무서운 눈초리로)
....나는 너를 못 믿겠다.
신장을 열어 잡동사니들을 막 뒤지다가 장도리 하나를 골라 드는 대수, 문 쾅 닫고 나간다. 미도, 대수가 들여다보던 전화번호부를 끌어당긴다. 뜯겨나가고 남은 페이지에 ‘20년 전통의 중화요리 - [자....]라고 써있다. ’자‘ 다음은 찢기고 없다.
34. [자청룡] 앞 (낮)
간판이 잘 보이는 외경.
35. [자청룡] (낮)
정면 어딘가를 노려보는 대수 얼굴 클로즈업. 카메라 천천히 후진하면 젓가락으로 군만두를 쥔 손, 프레임 인된다. 카메라 바로 앞에 빅 클로즈업된 만두로 초점 이동.
36. 감금방 빌딩 앞 (낮)
10층 정도의 낡고 허름한 빌딩. 철가방, 정문을 지나쳐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간다. 거리를 두고 뒤를 좇는 대수. 또 그 뒤를 좇는 회색 밴.
37. 지하 주차장 (낮)
엘리베이터 기다리는 철가방, 대수가 자연스레 다가와 곁에 서자 경계하듯 쳐다본다. 문 열리자 들어서는 둘.
38. 엘리베이터 (낮)
버튼 안 누르고, 눈치보며 머뭇거리는 철가방.
대수
주방에 얘기해라....군만두에 부추 좀 웬만큼 넣으라구.
철가방, 안심하고 7층과 8층 버튼을 동시에 누른다.
40. 7.5층 복도 (낮)
어두운 복도 좌우로 각각 8개의 감금방. 의자에 앉은 간수, 잡지를 읽는다. 땡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 열린다.
간수
(보지도 않고)
놓구 가라.
복도에 철가방을 내려놓는 철가방,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지도 않고, 이미 놓여있던 빈 가방으로 바꿔들고 도로 내려간다. 계속 잡지 읽다가 인기척을 느끼고 돌아보는 간수. 바로 뒤에, 장도리를 치켜든 대수가 서있다.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장도리의 못 박는 쪽을 간수 관자놀이에 겨누고 섰다. 바위 같은 자세, 빈틈이 없다. 간수, 손은 이미 반사적으로 부츠에 꽂아놓은 단검 손잡이를 붙잡았지만 더 꺼내지는 못한다. 두 사람, 얼어붙은 듯 잠시 침묵이 흐른다. 시험해 보려는 듯, 천천히 단검을 1센티미터쯤 잡아 당겨보는 간수. 눈치 챘는지 못 챘는지, 전혀 반응 없는 대수. 엉거주춤한 자세로 고정된 채 진땀을 흘리는 간수, 다리를 떨기 시작한다. 뱀가죽 부츠 뒷굽이 바닥에 부딪히면서 요란한 소리를 낸다.
41. 사무실 (낮)
커다란 책상 앞의 철웅, 통화중이다. 커다란 비취가 박힌 금반지를 끼었다. 벽에 쌓아올린 모니터 16개. 다 똑같이 생긴 방에 갇힌 수감자들. 방안을 빙빙 도는 사람, 군만두 먹는 사람, 몸을 마구 긁어대는 사람, 자위행위 하는 사람, 열심히 벽을 파는 사람....물론 빈방도 있다.
철웅
저희는 뭐 정찰제니까 네고 같은 거 없이 간단합니다.
일 년까지는 하루 십오만원, 일 년 넘으면 십만원, 삼년부턴 칠만원, 이렇구요
데려오는 비용은 별돕니다. 경호원 딸려 있구 그런 사람이면 우린 못 하구요
그거 또 전문으루 하는 애들 있거든요, 그런 데 맡기셔야 되구요
그냥 좆밥이면 저희가 합니다. 서울 경우엔 이백 받구요, 지방은 뭐 어디냐에 따라서
아, 물론 일년 이상일 경우에 한해서 데려오는 비용은 저희가 서비스루다가....예....
쾅! 문 부서지는 소리에 쳐다보는 철웅. 간수가 들어선다. 뒤에, 간수의 단검과 장도리를 든 대수.
잠시 후 -
간수가 전깃줄로 철웅의 몸을 묶는다. 뒤에 서서 지켜보던 대수, 간수가 매듭의 고리를 만들었을 무렵 장도리를 치켜든다. 비명 지르는 철웅, 돌아보는 간수, 내려오다가 허공에서 멈추는 장도리. 부들부들 떨기 시작하는 간수. 조금 고민하던 대수, 장도리의 쇠뭉치 바로 아래를 감아쥔다. 턱을 쥐고 고개를 돌려놓은 다음 나무 손잡이로 뒤통수를 냅다 갈긴다. 또 비명 지르는 철웅. 졸도한 간수의 몸을 치워버리고 고리를 힘주어 묶는 대수.
철웅
(애써 용기를 내)
어쩌냐, 칠 점 오층을 알았으니 인제 넌 죽었네?
대수
왜 날 감금했나.
철웅
의뢰 받은 대로 한 것 뿐이야.
책상에서 볼펜을 하나 집어드는 대수. 불안한 눈빛으로 지켜보는 철웅의 허벅지를 갑자기 꼬집는 대수, 비명 지르느라 벌어진 입에 재빨리 볼펜을 물린다. 눈이 휘둥그레지는 철웅, 뭐라고 말을 하려고 하지만 제대로 발음이 되지 않는다. 만족스러운 표정의 대수, 장도리를 입에 집어넣고 못 뽑는 홈에 이빨을 끼운다. 몸부림치는 철웅. 비틀어 당기는 대수, 밖으로 누운 이빨을 손으로 뽑아버린다. 피가 철철 흐른다.
대수
(소매를 걷어 팔뚝의 문신을 보여주며)
너도 내 십 오 년을 못 잊게 해주겠다.
몇 살이지? ....마흔....넷?
(고개를 흔드는 철웅)
....마흔 다섯?
(끄덕이는 철웅)
하나 빠질 때마다 일 년씩 늙어가는 거야, 알았지?
두 번째 이빨을 뽑는 대수, 처절한 비명. 페이드 아웃.
잠시 후 -
책상 위에 놓인 이빨 15개를 세는 대수. 아래위 앞니가 죄 뽑힌 채 피를 철철 흘리는 철웅.
대수
....쉰 일곱, 쉰 여덟, 쉰 아홉....환갑이다.
철웅 입에서 볼펜을 뺀 다음 목에 칼을 갖다댄다.
철웅
(새는 발음으로)
....몰라, 얼굴 못 봤어....녹음 해놨어....
턱으로 가리키는 캐비닛을 여는 대수, ‘1988’이라고 씌어진 상자 뚜껑을 열면 카세트 테이프들이 빼곡이 꽂혀 있다. 커버 등에 ‘오대수’이라고 적힌 테이프를 꺼내 주머니에 넣는다. 철웅을 일으켜 세운 다음, 목에 칼을 대고 입구로 가는 대수. 문 열자 열 명 가까운 덩어리들로 꽉 찬 복도, 갑자기 욕하고 겁주는 소리들이 터진다. 당장이라도 밀고 들어올 것처럼 으르렁댄다. 철웅을 앞세워 좁은 복도로 나서는 대수, 막다른 벽을 등지고 선다.
대수
....에이비 형, 손들어라.
(쭈뼛쭈뼛 손드는 두 놈에게 철웅을 떠밀며)
빨리 가라, 피 많이 흘렸다.
철웅을 부축하고 뛰어가는 건달 둘. 단검과 장도리를 양손에 쥔 대수, 등 뒤 비상문을 열고 달아난다.
42. 비상계단 (낮)
건물 외벽에 붙은 철제 계단을 뛰어내려가는 대수. 건달들이 몰려 내려오자 난간을 잡고 뒤로 뛰기 시작한다. 좁은 계단이라 한 명씩밖에 덤벼들 수 없다. 뒷걸음으로 내려가면서 하나씩 처치하는 대수, 때로 얻어맞기도 하지만 침착하게 상대 수를 줄여나간다. 장도리를 휘둘러, 주로 상대의 무릎 슬개골을 바숴버리는 대수, 앞으로 고꾸라지는 건달들. 마침내 1층 도착했을 무렵에는 하나도 남지 않는다. 이마에 피 흘리며 비틀비틀 걸어가는 대수.
43. 거리 (낮)
밝은 햇살을 받으며 인파 속을 비척비척 걷는 대수, 현기증을 느낀다. 머리에서 피 흘리는 그를 쳐다보는 사람들. 횡단보도를 건너다 그만 휘청하더니 한쪽 무릎을 꿇고 만다. 마주 오던 한 사내가 급히 부축한다.
사내
아저씨, 괜찮으세요? ....아저씨!
으- 이 피 좀 봐!
손수건을 꺼내 이마에 대준다.
대수
(죽어가는 소리로)
....죄송합니다....택시 좀....고맙습니다.
대수를 데리고 길을 건넌 사내, 택시를 잡는다. 거의 가로막다시피 해가면서 택시를 잡은 사내, 대수를 태운다.
사내
(운전사에게 수표 한 장을 주며)
응암동 세운 아파트 오 동이요....부탁합니다!
대수
....고맙습니다, 아저씨....
사내
....아유, 뭘요....그럼....
(갑자기 표정이 바뀌더니)
....잘 가라, 오대수....
순간 정신이 번쩍 든 대수, 돌아보면 문 쾅 닫히고 택시 출발한다. 돌아보면 인파 속으로 사라지는 사내 뒷모습. 차를 세울 기력이 없는 대수, 가물가물 의식이 흐려진다.
44. 꿈1 - 감금방
눈뜨는 대수, 고개 돌려 주위를 보면 조금씩 윤곽이 잡히며 낯익은 풍경이 시야에 들어온다. 침대와 텔레비전, 탁자와 램프들....여기는 다시 감금방? 벌떡 일어나 앉는다. 또 다른 자신을 발견한다. 어른 얼굴에 30센티미터 정도 사이즈의 대수가, 상대적으로 어마어마하게 커 보이는 의자에 빨강 야구모자를 쓰고 앉아 있다. 무표정하게 바라보는 대수. 빤히 마주보는 작은 대수.
대수
(조금 짜증스럽게)
너, 누구야?
(무어라 말을 하는데 들리지 않자, 답답하다는 듯)
....뭐?
45. 미도의 집 (밤)
거실. 잠깨는 대수. 얼굴 여기저기 멍든 자국, 머리에 감긴 붕대. 돌아보면 곁에 잠든 미도, 손에는 가위를 들었고 옆에는 반창고. 코고는 소리가 요란하다. 가위를 빼주고 가만히 내려다보는 대수. 무심코 돌아보다 옆에 놓인 피묻은 손수건을 발견하고 집어드는 대수. 택시 잡아준 사내의 것이다. 펴보면, 보라를 주조색으로 한 격자무늬.
보이스 오버로, 나지막이 [브람스의 자장가] 멜로디를 부르는 우진의 허밍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얇은 티셔츠로만 가려진 미도의 가슴이 숨쉴 때마다 오르내린다. 번쩍 안아드는 대수, 침실로 데리고 간다.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준 다음, 다시 내려다본다. 베드사이드 테이블에 놓인 회칼을 한 번 들어본다. 칼 놓고 돌아서는 대수, 문고리 잠금 장치를 안에서 누른다.
고성능 망원경 시점 - 맞은편 건물에서 본 광경, 가까이 들리는 허밍 소리. 침실 문 옆에 선 대수, 불을 끄고 나가서 문 닫는다. 팬하면 거실로 나오는 대수, 카세트 플레이어를 찾아서 테이프를 재생시킨다.
귀기울여 듣는 대수 얼굴 클로즈업.
철웅
(소리)
밉지만 차마 죽이지는 못하겠다거나
죽이는 정도로는 만족할 수 없을 만큼 밉다거나.
그럴 때 저희가 도와드립니다.
우진
(소리)
오래 갇혀있으면 미치지 않나요?
철웅
(소리)
옵션으로 텔레비전이 제공될 수 있는데요
그게 있으면 발병이 상당히 지연된다는 자체 통계가 나와있습니다.
정 미치는 걸 원치 않으실 경우에는 저희가 음식에 약물을 좀 투여할 수도 있구요.
[익스페탈 솔루션]은 꽤 신뢰할 수 있는 정신분열증 치료제로 알려져 있죠.
뭐, 언제나 문제는 기간입니다만....
손님께서는 어느 정도....?
우진
(소리)
십 오 년입니다.
(허걱! 숨 들이마시는 소리)
....안 되겠습니까?
철웅
(소리)
....아니, 무슨 죄를 지었길래....
우진
(소리)
오대수는....너무 말이 많습니다.
망원경 시점 - 테이프 리와인드, 리플레이해가면서 반복청취하는 대수.
우진
(자장가 허밍을 끝내고, 소리)
....그만 자거라....내일쯤엔 주환이 피씨방 가봐야지....
46. 거리 (낮)
대수, 걷는다.
47. PC방 (낮)
문 열리고 대수 들어선다. 둘러보면, 게임 효과음으로 시끄러운 지하 PC방. 전체적으로 어두운 분위기에 모니터들만 빛을 발한다. 띄엄띄엄 앉은 손님들. 카운터로 다가가는 대수. 주환, 인터넷에 빠져 있다.
주환
(돌아보지도 않고)
아무 데나 앉으세요.
대수
주환아.
돌아보는 주환.
잠시 후 -
철컥, 카세트 플레이어 끄는 대수.
대수
....이 목소리, 들은 적 있어?
주환
(갸웃)
글쎄....
대수
이 정도로 날 증오할 만한 사람, 알아?
주환
아니, 날더러 그 이백 육십 명의 가시나들 이름을 다 대라는 것이냐?
혼자 깔깔 웃는 주환, 대수가 반응을 보이지 않자 머쓱해진다.
대수
‘에버그린’이란 이름은?
주환
에버그린?
잠시 후 -
PC 앞에 앉은 대수와 주환. 모니터에는 ‘MSN 메신저’의 로그인 화면. 대수, ‘몬스터’라는 대화명을 입력한다. 대화상대 리스트창에 ‘미도’만 달랑 하나 떠있다. 대수, 주환에게 자리를 비켜준다.
주환
미도가 누구냐?
대수
있다, 말 많은 애....주환아.
주환
응?
대수
(망설이다 어렵게 말을 꺼내며)
....내가 정말 그렇게 말이 많았니?
주환
(망설이다 어렵게)
....누군진 몰라두 말야....내가 보기에는 말이다....
왠지 널 무척 잘 아는 놈이라는 생각이 든다.
....범인을 가까운 데서 찾아보라고 권하구 싶다, 나는.
대화상대 추가화면에 ‘에버그린’을 입력하는 주환. 검색어를 쳐 넣고 엔터키를 누른다. 화면에 뜨는 회원정보란, 모두 비었다. 이때 땡 소리와 함께 뜨는 문장 - ‘에버그린님이 당신을 대화상대로 추가하셨습니다.’ 경악하는 대수, 서둘러 ‘회원의 온라인 접속여부를 알려주고 대화를 허용함’ 아래 ‘확인‘을 클릭한다. 대화창이 뜨고 메모가 도착한다. ’당신의 형기는 아직 끝난 게 아니랍니다. 그러니, 부디 기억하세요 - 노루가 사냥꾼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같이, 새가 그물 치는 자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같이, 스스로 구원하라.‘ 모니터에 시선 고정한 채 얼어붙은 대수.
주환
뭔 소리야?
대수
[잠언] 육 장 사 절.
주환
너, 예배당 댕기니?
대수
채널 삼십 이, [천국의 소리] 방송 열심히 보면 안다.
대수, 나간다.
주환
야, 어디가? ....오대수!
48. 미도의 집 (저녁)
침대에 누운 미도, 손발이 침대 다리들에 묶였다. 올라타고 앉은 대수, 회칼 끝을 목에 겨누고 있다.
미도
(겁에 질려)
아저씨....나 이런 체위, 별루거든요?
대수
너 누구냐.
미도
(울음을 터뜨리며)
그러는 너는 누구냐, 이 나쁜 놈아....
대수
갇혀있는 동안 결심했다, 나가면 누구도 믿지 않겠다고.
누구든지 의심 가는 사람이 생기면 그 사람하고 나만 아는 비밀을 만들어 두겠다고.
대화명 ‘몬스터’는 너를 잡기 위한 함정이었다.
....처음 만난 남자를 집에 끌어들이는 너는, 도대체 누구냐.
(억지로 고개를 들어 침을 뱉는 미도. 대수, 닦을 생각도 않고)
아니, 에버그린이 누구냐.
전화벨이 울리자, 휴대전화기를 꺼내 받는 대수.
대수
여보세요.
주환
(소리)
에버그린 아이디 추적해서 신상명세 알아냈다, 적을 준비 됐냐?
두리번거리다 눈에 띄는 대로 화장대 위 립스틱을 집어드는 대수.
대수
불러.
주환
(소리)
근데 좀 이상해. 이름은 ‘수대오’고....‘수’씨두 있나? 화굔가봐.
(셔츠가 걷어 올라가 맨살이 드러난 미도의 배에다 적기 시작하는 대수.
간지러워 몸을 뒤트는 미도)
생년월일로 봐서 나이가 열 다섯 살이구....아무래두 가짜 같지?
대수
주소는?
주환
(소리)
응암동 세운아파트 육 동 사백 칠 호
‘응암’까지 쓰던 대수, 전화를 끊으면서 창 밖을 돌아본다. 맞은편 건물 같은 층의 한 집만 창이 어둡다.
49. 아파트 단지 (저녁)
5동을 나와 6동으로 뛰어가는 대수.
50. 6동 407호 (저녁)
벌컥 문 열리고 대수 들어선다. 거실 창을 등지고 선 두 사내와 망원경의 실루엣이 보인다. 회칼 든 손으로 벽을 더듬어 스위치를 올리지만 켜지는 전등 없다. 어둠에 적응하면서 택시 잡아준 사내, 우진의 얼굴을 알아본다. 허름한 점퍼를 걸쳤다. 옆에는 경호실장, 늙고 과묵한 사내. 우진을 향해 걷기 시작하는 대수.
우진
(대수가 입을 열려는 찰나)
‘에버그린, 넌 누구냐’ ....이럴려고 그러지?
안 돼....스스로 알아내야지요, 게임인데....
먼저, 누구냐....그리고 그 다음에, 왜냐.
문제 풀면 언제라도 찾아와요, 채점해줄 테니까. 마감은 칠월 오 일.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더니, 마음속으로 조금 계산을 하고 나서)
....닷새 안에 수수께끼를 풀어요.
....짧아요? 어려운 만큼 보답도 크니까 힘내요.
성공만 하면, 미도 말고 내가 죽을 게요.
대수
(귀를 의심하며)
미도?
우진
당신은 자기 여자를 잘 못 지키기로 유명한 남자잖아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눈이 뒤집힌 대수, 덤벼들어 목을 조른다.
한 걸음 나서려는 경호실장을 눈으로 제지하는 우진, 캑캑거리면서도)
와- 힘세다, 미스터 몬스터....
(영어로)
역시 당신은 내가 발명한 괴물이야.
대수
(코웃음치며)
너 같은 놈이 미도를 죽일 능력을 가졌다고는 믿기 힘들다.
칼끝을 목에 대고 살짝 힘을 주는 대수, 찔끔 피 한 방울.
우진
(엄살떨며)
아, 아....!
근데요....이러면 ‘왜’를 알 수가 없잖아요.
십 오 년이나 궁금했던 거 아녜요? 그래도 괜찮아요?
망설이던 대수, 우진 목을 놓고 돌아서더니 집안을 뒤지기 시작한다. 호기심에 차서 지켜보는 우진. 어디선가 볼펜과 장도리를 찾아오는 대수.
대수
(다가오며)
거기 앉아라.
재킷을 벗는 대수. 의자에 앉아 역시 점퍼를 벗는 우진, 셔츠 단추도 푼다.
우진
아마 고문할 시간이 없을 거예요.
난 유전적으로 약한 심장을 타고났거든요?
(셔츠 자락을 젖혀, 왼쪽 가슴의 수술 자국을 보여주며)
이 안에 심장 박동을 도와주는 모터를 넣었구요.
그거 넣을 때요, 내가 의사한테 뭐라구 했는지 아세요?
(영어로)
‘닥터 홉킨스....그 모터, 리모콘으로 끌 수도 있게 해주세요.’
‘예? 왜죠?’
‘언제든지 쉽게 자살할 수 있게요....오 만 달러 더 드릴 게요’
(손바닥을 펴 보이면, 플라스틱 덮개가 달린 리모트 컨트롤러. 좌절하는 대수에게)
....이럴 시간에, 이거나 좀 보지 그러세요?
시키는 대로 망원경을 들여다보는 대수.
망원경 시점 - 미도의 침실. 괴한들이 미도가 누운 침대를 세워 벽에 기대놓았다. 미도 몸이 정면으로 보인다. 옷이 여기저기 찢겼다. 칼로 팬티를 찢어 흔드는 놈도 있고, 젖가슴 주무르던 사내 돌아보면 철웅. 망원경을 향해 씨익 웃어 보이는 철웅, 앞니가 모조리 금이다.
51. 아파트 단지 (밤)
6동을 나와 5동으로 뛰어가는 대수.
52. 미도의 집 (밤)
벌컥 문 열리고 장도리 든 대수, 들어선다. 각종 연장을 든 부하들이 에워싼다. 한 놈은 미도 목에 칼을 대고 있다.
철웅
(부하1에게)
그거 좀 빌려달라 그래라.
부하1, 대수의 장도리를 뺐어서 갖다준다.
미도
(대수에게)
살려 주세요, 아저씨....
대수
....내가 죽게 생겼다.
부하들, 대수를 끌고 와 강제로 철웅 앞에 무릎 꿇린다. 주머니에서 명함을 한 장 꺼내는 철웅.
철웅
(주머니에 넣어주며)
여기 치과 잘하드라, 야.
부하들, 완력으로 대수 입을 벌린다. 장도리로 대수의 이를 뽑는 철웅. 비명 지르는 미도. 입에서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철웅을 쏘아보며 씨익 웃는 대수, 놀라는 철웅. 억지 미소를 입가에 고정시키는 대수, 뒤로 돌린 재킷 소매에서 회칼이 미끄러져 내린다.
우진의 망원경 시점 - 칼을 움켜쥐는 대수의 손.
철웅, 잔인한 미소를 띄우며 두 번째 이빨을 뽑으려 한다. 전화벨 울린다. 일제히 자기 전화기를 확인하는 부하들. 두리번거리다 휴대전화기를 꺼내는 철웅.
철웅
여보세요.
우진
(소리)
그쯤하고 가시죠, 이제.
철웅
예?! 아니, 선생님....여기 가르쳐주신 건 고마운데요
벌써 가라뇨, 아직 열 네 개나 남았는데....
우진
(소리)
이쪽 좀 내다보실래요?
(창 앞으로 가 6동을 보는 철웅. 전화기 들고 선 우진이 조그맣게 보인다.
옆에는, 서류가방을 들어 보이는 경호실장)
....일 억 원입니다.
고민에 휩싸인 철웅의 얼굴.
53. 아파트 단지 (밤)
5동을 나와 6동으로 뛰어가는 부하1.
54. 미도의 집 (밤)
6동을 주시하는 철웅. 부하1이 창 앞에 나선다. 가방을 열어 가득 든 지폐다발을 보여준다.
철웅
(부하들에게)
....가자.
일동 나간다.
대수
(소리)
....싸우자.
멈춰 서서 돌아보는 철웅.
철웅
(못 알아듣고)
뭐?
대수
(엎어진 채 더 힘을 내)
싸우자....
철웅
앗, 넌....
(손가락질하며)
....악바리닷!
대수
아까....미도 젖 만졌잖아.
네 손목을 잘라주고 싶으니까, 싸우자....
칼을 움켜쥔 대수, 안간힘을 다해 몸을 날린다. 부하2가 가슴팍을 냅다 걷어차자 다시 나뒹군다. 철수하는 패거리. 대수, 신음하며 돌아보면 멀리 6동 407호에 아무도 없다.
55. [맥심빌딩] 앞 (밤)
재규어가 와 선다. 경호실장 내려서 뒷문 열자 우진 내린다. 대기하던 비서실장과 함께 로비로 들어서는 우진, 수위가 깎듯이 인사한다.
56. 엘리베이터 (밤)
우진 옆에 선 비서실장, 보고중이다.
비서실장
(서류를 보며)
....우림 빌딩 매각 건은 아무래도 성사되기 힘들어 보입니다.
알아보니까, 저쪽에서 이천 삼 백억 이상은 어렵겠다고 버티고 있는 게
무슨 시세 평가 문제가 아니라 씨비에서 대출 한도를 묶어버려서 그렇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사실상 능력이 안 된다고 봐야하지 않을까....
바닥만 보는 우진, 전혀 관심 없어하는 눈치다. 경호실장도 장승처럼 섰다. 엘리베이터가 ‘P’층에 선다.
57. 펜트하우스 (밤)
엘리베이터 문 열리고 우진과 비서실장 들어선다. 도시 야경이 잘 보이는 고층 빌딩 최상층 전체. 엄청나게 넓은 실내에 심플한 디자인의 가구들 몇 개, 전체적으로 미니멀하다. 보라를 주조색으로 한 격자무늬 벽지가 인상적이다. 대기하던 의사와 간호사가 인사한다. 우진, 후줄근한 점퍼며 바지를 벗어 던진다. 경호실장이 하나씩 줍는다.
비서실장
(서류를 보며)
....최대주주 최인범 회장의 특별관계자 이십 삼 인의 지분은 이십 오 프로지만
의결권이 없는 자사주가 십 일 프로를 차지하고 있고
최 회장이 순수하게 보유하고 있는 지분은 삼 점 칠 프로에 불과한 상황입니다.
그 외 차남인 최동윤 부사장이 지니고 있는 지분은 이 점 영 프로
최부사장이 최대주주로 있는 동진무역 보유 지분은 이 점 칠 프로입니다.
따라서 이번 작전은, 경영권을 방어하고 나아가 차남에게 경영권을 이전시키려는....
대답 없이 옷을 다 벗고 욕실로 들어가는 우진.
잠시 후 -
샤워 마치고 나오는 우진에게, 비서실장이 서류와 만년필을 내민다. 읽어보지도 않고 서명해주는 우진. 절하고 나가는 비서실장. 알몸으로 돌아다니는 우진, 진료용 침대에 눕는다. 여간호사도 익숙한 듯하다. 정기 심장 검진을 시작하는 의료진. 창 밖을 내다보며 휴대전화로 소곤소곤 통화하던 경호실장이 돌아선다.
우진
(혈압계를 팔뚝에 두르고,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그대로 있나요?
경호실장
박철웅 일당이 사라지고 삼십 분쯤 있다가 둘이 함께 나갔습니다.
여행용 트렁크까지 들고 공항 근처 싸구려 호텔로 갔습니다.
우진
여자아이는 직장도 안 갔나요?
경호실장
사장한테 전화해서 그만두겠다고 말했습니다.
우진
한 시간 있다가 가겠습니다, 준비해 주세요.
경호실장
오늘은 이만 주무시는 게....
우진
고독해서 잠도 안 와요.
물러가는 경호실장. 수직 부감으로, 누운 우진과 주위의 의료진. 심전도계 모니터에 그려지는 녹색 라인.
인써트 - 탁상용 시계 클로즈업. 날짜를 표시하는 숫자판이 6월 30일에서 7월 1일로 넘어간다.
58. [콩코드 모텔] 앞 (밤)
번쩍이는 네온 간판. 3층에 불 켜진 방 하나. 커튼을 치는 대수의 실루엣.
59. 객실 (밤)
감금방과 비슷한 실내. 창가에 선 대수, 커튼을 조금 열어 밖을 살핀다. 그의 눈에는, 어둠 속에 주차된 자동차, 서성이는 남녀 모두가 예사로와 보이지 않는다. 걸어와 침대 끝, 미도 옆에 나란히 앉는 대수. 미도, 화난 얼굴이다.
대수
....미안하다.
(외면하는 미도의 손을 잡고)
....잘못했다.
(뿌리치는 미도)
....어째야 화를 풀겠니.
미도
(잠시 침묵 끝에 고개 돌려 대수를 보며)
....웃어요.
(어리둥절해 하는 대수에게)
웃어보라니까!
억지로 웃는 대수. 앞니 대신 피에 젖은 솜뭉치가 끼여있는 그 얼굴을 본 미도, 폭소를 터뜨린다. 침대 위를 데굴데굴 굴러다니며 깔깔거리던 미도, 대수 앞에 다시 서서 입술을 억지로 벌려놓고 또 웃는다. 화가 난 대수, 미도의 운동복 바지를 확 내린다. 폭소를 터뜨리는 대수. 그의 얼굴을 잡은 채 얼어붙은 미도. 뒤에서 본 모습 - 미도의 맨 엉덩이.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한 미도 표정, 실수를 깨닫고 바로 바지를 올려주는 대수.
대수
(미안해하며)
....안 입었구나....
미도
(얼굴 빨개져서)
....아까 아저씨가, 최대한 빨리 짐 싸라구 했잖아요.
(묵묵히 일어서 나가려는 대수를 보고)
....어디 가요?
대수
(미도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빤스 사러 간다.
미도
바보야, 가방엔 싸왔지!
돌아와 다시 침대 끝에 엉거주춤 앉는 대수. 미도도 옆에 털썩 앉는다. 곤란한 침묵.
대수
(고개 푹 숙이고)
....싸왔으면 입어라.
(고개 돌려 대수를 쏘아보던 미도, 트렁크에서 새 팬티를 꺼내온다.
다시 침대에 앉아 가만히 있더니, 갑자기 티셔츠를 벗어 가슴을 드러낸다. 대수, 놀라)
아니, 빤스....
말을 맺기도 전에 갑자기 불이 꺼져버린다. 돌아보면, 어느 틈에 갔는지 침대 머리맡의 전등콘트롤박스 옆에 선 미도. 난처해진 대수 얼굴에서 빠른 페이드 아웃.
대수
(검은 화면에서 소리, 나지막이 타이르는 투로)
야, 야....
페이드 인되면, 옷을 다 벗은 남녀를 위에서 내려다본 앵글 - 다리를 쭉 뻗고 바짝 오므린 미도의 경직된 자세. 그 무릎을 벌리려는 대수의 답답해하는 얼굴에, 갑자기 불이 환하게 켜진다.
대수
(눈부셔 하며, 절망적으로)
....왜 이러냐....
미도
먼저 보구 싶어요.
대수
(한숨 쉬며)
....뭘....
미도
도대체 어떻게 생긴 물건이 내 안에 들어가는지, 좀 봐둬야겠어요.
대수
....나중에 보면 안 될까?
대답 없는 미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대수, 결심한 듯 몸을 일으켜 미도의 상체를 타고 앉는다. 관찰이 시작된다.
미도
(찡그리며)
으- 징그러....만져봐도 돼죠?
대답하기도 전에 손을 뻗는 미도. 닿는 순간, 몸을 떠는 대수.
대수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흐어억!
(잠시 후)
....됐지?
도로 불 끄는 미도. 작업 재개. 그래도 무릎을 안 벌려주는 미도.
미도
(또 딴소리 시작)
....어떻게 참았어요....십 오 년이나?
대수
(무릎에 집중하느라 건성으로)
....다 방법이 있다.
(또 한참 땀 흘리다가)
....자꾸 그러면 아저씨 화낸다....
(갑자기 벌어지는 무릎. 순간 휘청하는 대수, 다시 몸을 일으키며 자기도 모르게)
....옳지!
이내 자세를 바로잡고 삽입한다. 비명 지르는 미도.
잠시 후 -
대수의 격렬한 움직임. 삐걱이는 침대. 짐승 같은 소리까지 지르는 대수. 이를 악 물고 고통을 참는 미도.
잠시 후 -
침대 끝에 앉은 대수. 허벅지에 올라앉은 미도, 엉거주춤 남자의 상체를 끌어안고 그의 움직임에 몸을 맡긴다. 미도의 둔부가 대수 허벅지에 부딪히며 내는 소리. 차츰 느끼기 시작하는 미도, 신음이 새어나온다.
잠시 후 -
침대에 엎드린 미도. 뒤에서 움직이던 대수, 갑자기 미도를 바로 눕힌 다음 재삽입. 몇 번 더 허리를 움직인 끝에 사정한다. 온힘을 다해 미도를 끌어안는 대수, 어금니를 꽉 깨물고 상처받은 야수 같이 으르렁댄다.
60. 밴 (밤)
대수의 신음 소리 연결. 도청 장비로 가득한 실내에서 그 소리를 듣는 우진과 경호실장. 쓴웃음 짓는 우진.
61. [콩코드 모텔] 앞 (밤)
건물 바깥 담 옆에 주차된 회색 밴. 밖에 달린 둥근 안테나, 거미줄처럼 생긴 그것의 클로즈업에서 페이드 아웃.
62. PC방 (밤)
홀로 앉아 인터넷을 뒤지는 주환. 검색 엔진에 ‘에버그린’을 입력한다. 그 낱말과 관계된 여러 사이트, 홈페이지 명칭이 뜬다. 가장 위에 적힌 사이트로 우선 들어가 보는 주환.
63. 꿈2 - 감금방
눈뜨는 대수, 침대에서 일어나 앉는다. 또 다른 자신을 발견한다. 미니어쳐 대수가 많이 자랐다. 어른 얼굴이지만 열 살 난 아이 크기의 대수가, 역시 빨강 야구모자를 쓰고 앉아 있다. 무표정하게 바라보는 대수. 빤히 마주보는 작은 대수.
대수
(조금 짜증스럽게)
너, 누구야?
(무어라 말을 하는데 들리지 않자, 답답하다는 듯)
....뭐?
(뭔가 귀에 들어올 듯)
....뭐라구?
순간 요란한 전화벨. 소리나는 쪽으로 고개를 홱 돌리는 대수, 두리번거리며 찾지만 전화기가 보이지 않는다. 벨소리 계속된다.
64. PC방 (밤)
수화기를 통해 들리는 벨소리로 연결. 핸즈프리를 귀에 꽂은 주환, 모니터에 뜬 ‘에버그린 콰이어 - 상록고등학교 OB 합창단 홈페이지’를 보는 중이다.
대수
(한참만에, 잠이 덜 깬 목소리로)
....여보세요.
주환
(다짜고짜)
‘에버그린’ 말야....‘상록’을 영어로 바꾼 거 아닐까?
대수
(소리)
상록?
65. 밴 (밤)
도청하는 우진과 경호실장.
주환
(소리)
전학 갔다구 이름까지 까먹었냐? 상록고등학교 말야.
대수
(소리)
상록고등학교....
빙그레 웃는 우진.
66. [콩코드 모텔] (새벽-아침)
알몸으로 잠든 대수와 미도. 대수는 휴대전화기를 손에 쥔 채로 자고, 미도의 코고는 소리는 여전하다. 방문 아래 틈으로 하얀 개스가 새어 들어온다. 몸을 뒤척이는 대수.
잠시 후 -
안개 낀 것처럼 자욱한 실내. 방문 열리고 방독면 쓴 우진 들어온다. 손수건과 같은 무늬의 보라색 천을 댄 상자를 들었다. 방독면을 통해 나오는 거친 숨소리. 천천히 들어와 창을 연다. 빠른 속도로 개스가 빠져나간다. 머리칼이 날린다. 침대 곁에 서서 잠든 남녀를 한참 내려다본다. 방독면을 벗어들더니 미도의 얼굴을 쓰다듬는다. 커튼이 휘날린다. 방 가운데 탁자에 물건을 놓고 나가는 우진, 개스통을 들고 복도에서 기다리던 경호실장이 문을 닫는다.
잠시 후 -
창으로 햇살이 든다, 커튼이 바람에 날린다. 알몸으로 침대에 나란히 앉아 정면 응시하는 대수와 미도. 그들 시점으로, 탁자에 덩그러니 놓인 보라색 상자. 미도의 재채기가 침묵을 깬다.
잠시 후 -
시트를 알몸에 두르고 서서 탁자를 내려다보는 대수와 미도. 그들의 시점으로, 뚜껑 열린 상자, 그 안에 든 사람의 손목, 커다란 비취가 박힌 금반지. 잠시 무표정하게 응시하던 미도, 훌쩍 콧물을 들이마신다.
67. 용산전자상가 (아침)
두리번거리며 걷는 대수와 미도.
미도
(겁에 질린 목소리)
이게....무슨 뜻이죠?
대수
(소리)
뻐기고 있다, 맘만 먹으면 날 죽일 수 있다고.
원하는 업소를 발견하고 들어가는 남녀.
미도
(소리)
근데....아저씨가 손목을 잘라주겠다구 한 말
그걸 어떻게 들었....애취!
대수, 주인에게 다짜고짜 수첩을 내민다. ‘도청 당하고 있습니다. L&T의 F236 테스터로 검색을 부탁합니다.’라고 쓰였다. 묵묵히 물건을 내보이는 주인, 고개를 끄덕이는 대수. 테스터의 스위치를 올리는 주인, 먼저 자기와 미도의 휴대전화기부터 내미는 대수.
잠시 후 -
구두를 검색하는 테스터, 붉은 램프가 번쩍이면서 삐- 소리가 난다. 굽을 비틀어 떼는 대수, 역시 도청기가 들었다. 녹색 고무판 위에 떨구는 주인. 이미 박살난 도청기 4개의 잔해가 보인다. 5번째 것을 망치로 내리치는 대수.
68. 밴 (아침)
계기의 램프 하나가 꺼진다. 우진, 빙글빙글 웃는다. 주머니에서 수건으로 싼 물건을 꺼내 건네는 경호실장.
경호실장
너무 위험해지고 있습니다.
우진, 펼쳐보면 작은 호신용 권총.
69. PC방 (낮)
화장실 세면대를 검색하는 테스터, 붉은 램프가 번쩍이면서 삐- 소리가 난다. 도청기를 찾아내는 대수, 구두로 밟아 부순다. 주환이 쓸어 담는다. 상자 안에 10개쯤의 망가진 도청기들이 보인다. 이제 보니 주환은 절름발이다.
주환
너 혹시, [국가정보원]에 쫓기구 있는 거 아니니?
잠시 후 -
상록고 졸업앨범 페이지를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사진을 검토하는 대수와 주환.
주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
....없어? 어려 보였대며, 그 새끼? 몇 살쯤 돼 보이대?
....우리 아래 기수 앨범을 좀 구해봐야되겠구만.
헌데 어디 가서 구하나....?
70. 고속도로 (낮)
운전하는 대수.
71. 상록고 운동장 (오후)
방과 후 해지기 직전, 축구하는 학생들의 그림자가 길다. 차 들어오고 대수 내린다. 감회 어린 눈빛으로 교정을 둘러본다.
교사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찾았어요?
72. 도서실 (저녁 - 밤)
문가에 서서 바라보는 숙직교사. 책상에 앉아 돌아보는 대수. 창으로 들어오는 마지막 노을 빛, 실내는 거의 어두침침하다.
교사
어이구, 눈 나빠져요.
(전등 스위치를 올리며)
인제 문 닫아야 되는데.....
대수
(켜지면서 껌뻑거리는 형광등 빛을 받으며)
....이십 회 졸업생들 생활기록부 좀 볼 수 있을까요.
앞에 놓은 졸업앨범으로 다시 시선을 돌리는 대수. 시점 - 펼쳐진 페이지의 클로즈업. 형광등이 완전히 켜지면서 소년 우진의 사진이 환하게 밝혀진다. 사진 아래 ‘이우진’이라 적혔다.
73. 운동장 (밤)
교사 건물 외경. 방 하나만 불이 환하다.
74. 도서실 (밤)
졸업앨범 뒤에 붙은 주소록 클로즈업. 명단을 짚어 내려가는 대수의 손가락.
대수
(소리)
이십 회, 이우진이라고 아니?
(‘이우진’ 이름에 멈추는 손가락, 아래 기재된 주소는 미국의 어딘가)
....미국 유학 간 거 같은데.
전화기를 어깨에 끼고 통화하면서 손으로는, 낡아서 모서리가 너덜거리는 기록철을 끌어당겨 넘기기 시작하는 대수.
주환
(소리)
우진이?
(인써트 - 픽 웃는 우진 얼굴. 묵음)
....몰라.
결국 우진 사진이 붙은 생활기록부 페이지를 발견한다. 우진의 성적, 가족사항, 성격 및 능력 평가 따위를 읽는다.
주환
(소리)
야, 내 차 잘 있지?
가족사항란을 보면 ‘이수아(妹) - 상록고등학교 3학년 재학중’이라고 적혔고 거기 붉은 줄 2개가 가로 그어졌다.
대수
이수아는 알아? 우리하고 동긴데.
주환
(소리)
....이수아? ....걔 죽었는데?
인써트 - 이를 악무는 우진의 얼굴. 묵음.
2학기 비고란에 ‘누나를 여의고부터 우울증세를 보임. 각별한 주의 관찰 요망’이라고 적힌 문장을 읽는 대수.
대수
몇 반이었는데?
23회 졸업앨범을 다시 찾아 펼쳐보는 대수.
주환
(소리)
이 반, 나랑 한 반이지....니 옆 반....근데 수아는 왜?
2반 페이지를 펼치는 대수, 물론 수아 사진은 없다.
대수
근데 왜....아, 죽어서 사진이 없구나....
주환
(소리)
당연하지....
소풍 가서 찍은 그룹 사진 하나를 주목하는 대수.
대수
이수아가 어떻게 죽었니.
사진 클로즈업. 예닐곱명 소녀들 맨 뒤에 얼굴 하나만큼의 자리가 허옇게 지워졌다. 그 사라진 소녀의 손 하나만 앞줄 친구의 어깨에 살짝 얹혀져진 채 남아 있다.
주환
(소리)
걔가....심장마비였는데....
왜 한계령까지 올라가서 죽었는지 그게 미스테리였지, 아마?
대수
어떤 애였니.
75. PC방 (밤)
손님이 많아 시끄러운 실내에서 통화중인 주환.
주환
(생각에 잠기며)
....한 마디루....걸레였다고나 할까?
(주환과 등지고 앉은 남자의 뒷모습, 이쪽을 돌아본다.
초점 이동하면, 우진. 입술을 깨물고 주환 뒤통수를 노려본다)
겉으루는 새침하고 요조숙년데, 이게 이게 속으로는 걸렌기라....
이놈저놈 안 따먹은 놈이 없다구 소문이 마, 파다했을 걸?
다시 고개 돌려 자기 앞을 보는 우진의 옆얼굴 클로즈업. 등뒤에서 주환 수다떠는 소리에 귀기울이며 일그러져 가는 표정. 천천히 일어나 뒤돌아 선다. 빠른 곁눈질로 주위 상황을 살피면서 주환에게 다가가는 우진을 클로즈업 상태로 따르는 카메라.
주환
(소리)
아- 난 뭐했나 몰라, 그때?
하여튼 부잣집 딸내미에다가, 공부두 잘 했지
잘 했는데....완전 내숭이었던 것이지....
하두 오래돼서, 야- 벌써 이십 오 년 됐다....기억은 잘 안 나는데....
아니, 잠깐만....대수, 너두 수아 알지 않았....
우진 얼굴 옆모습의 클로즈업, 칼을 든 손이 화면에 올라왔다 내려갔다 여러 차례 반복한다. 버둥거리는 주환의 손도 화면에 들락날락. 우진 얼굴에 피도 조금 튀어 묻는다.
76. 도서실 (밤)
불안한 표정으로 전화기에 귀를 기울이는 대수. 이상한 신음소리, 게임 소음 따위만 들릴 뿐이다.
대수
주환아....주환아!
우진
(장난스러운 목소리)
....노주환씨는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방금 성대가 잘렸거든요.
대수
....이우진!
우진
(소리)
....노주환씨는 너무 말이 많았습니다.
전화 끊어진다.
77. 고속도로 (밤-새벽)
인써트 - 탁상용 시계 클로즈업. 날짜를 표시하는 숫자판이 7월 1일에서 2일로 넘어간다.
과속 질주하는 대수. 멀리 동이 터 온다.
78. [콩코드 모텔] (아침)
미도에게 빈 트렁크를 던져주는 대수.
대수
갔다 올 테니까 빨리 싸라.
미도
또?!
대수
칠월 오일이 사흘밖에 안 남았다.
미도
이우진한텐 왜 그 날짜가 중요한 거죠?
대수
누나가 죽은 날이다....빨리 좀 싸라.
미도
....아저씨, 생각 좀 해보세요. 그 사람이 왜 날 해치겠어요, 예?
동기가 없잖아요, 동기가....
대수
(나가다 말고 돌아보며)
....이우진은 말 많은 사람을 싫어한다.
현관문 닫힌다.
79. 치과 (아침)
아침 청소중인 간호사. 종소리와 함께 들어서는 대수.
간호사
(상냥하게)
어서 오세요!
명함을 내미는 대수.
대수
생니 열 다섯 개 뽑혀서 금니 박은 사람 소개로 왔습니다.
잠시 후 -
겁에 질려 치료대 뒤에 숨은 의사와 간호사. 진료기록 카드를 든 대수, 철웅과 통화중이다.
대수
....오대수다.
80. 감금방 건물 앞 (낮)
새로 이사간 건물 외경.
81. 감금방 (낮)
예전 가구 그대로 옮겨온 실내. 수면용 안대로 얼굴을 가린 대수와 미도. 왼팔에 의수를 단 철웅, 눈짓하자 안대 풀어주는 부하들. 둘러보는 대수와 미도.
철웅
(텔레비전을 가리키며 대수에게)
이사 기념으루 새루 장만했다, 좋지?
(대수가 지갑에서 돈을 꺼내자 의수를 내저으며 엄숙하게)
내 적군의 적군은....
(갑자기 대수를 손가락질하며)
....앗, 아군이닷!
(주머니에서 비취 반지를 꺼내주자 받아들고 돌아선다.
이내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끼기 시작하는 뒷모습)
....여보....
숙연해지는 대수와 미도.
미도
(분위기를 바꿔보려고 일부러 활발하게)
....이우진 잡으면 가둘려구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그거죠?
햐아- 보기보다 독하네, 이 아저씨....
대수
(철웅에게)
그럼....
대수와 철웅 나간다. 따라 나가려던 미도, 철웅에게 밀려 도로 들어간다.
미도
어....어....?
문 닫힌다.
미도
(문 두드리며)
아저씨! 야, 야! 모야, 이거....아저씨!
소리 듣고 내려다보면, 배식구로 군만두 한 접시 들어온다.
82. 복도 (낮)
안대 쓴 대수, 철웅 일당과 함께 걷는다. 미도가 문짝 두드리며 고함치는 소리가 멀어진다.
대수
(묵묵히 걷다가)
....갇혀 있을 때....
누군가 날 찾아왔던 기억이 난다, 어렴풋이.
철웅
와- 기억하네?
대수
나한테 무슨 짓을 했나.
철웅
세 번인가....난 그냥 니 식수에다가 최면유도제 타는 일만 했는데....?
대수
(아무렇지도 않게)
소리움 바비튜레이스.
깜짝 놀라는 철웅. 엘리베이터 문 닫힌다.
철웅
(소리)
앗, 척척박사닷!
83. 미장원 (낮)
인써트 - 탁상용 시계 클로즈업. 날짜를 표시하는 숫자판이 7월 2일에서 3일로 넘어간다.
중년의 여주인과 이야기하는 대수.
영자
아유, 쫌 헤프단 소문 가지구 죽기야 했겠어? 딴 게 있으니까 그랬지.
(이어지는 이야기를 기다리는 대수. 영자, 좀 더 뜸을 들이다가 눈치를 살피며 슬쩍)
....예를 들면, 애를 뱄다든가 뭐 그런 거....
(이야기 들으면서 언뜻, 영자의 드러난 무릎을 보는 대수)
....아, 물론 나야 수아가 정말 그랬다고는 생각 안 하쥐....
얼마나 순진한 앤데....아무나 막 주고 그런 애는 아니....지만....
(기다리는 대수)
....내 말은....남자가 하나 있긴 있었다 이건데....
(기다리는 대수)
....그 놈이 누구냐? 그거야 모르지, 난....
(실망하는 대수)
원체 비밀이 많은 애라서 절대 말을 안 해, 그런 건....
젤 친한 애라면 모를까....
(뭔가 갈구하는 듯한 대수의 표정을 빤히 보더니, 전화기를 들고 단축 다이얼)
....이년아, 연락 좀 하구 살아라, 밥 처먹을 만 하니까 친구를 버리냐?
....시끄러, 이년아....야 춘심아, 너 이수아 알지? ....걔 사귀던 애가 누구냐? ....몰라?
이년아, 니가 그렇게 우정을 무슨 미친년 빤스 취급 하니 알 턱이 있니?
(다리를 포개는 영자, 무릎을 보면서 떠오를 듯 말 듯한 기억을 쥐어짜는 대수)
....시끄러, 이년아! 그럼 누가 알고 있을까? ....주환이?
(긴장하는 대수)
....응....응? 뭐?
(대수를 흘낏 보며)
....응 알지, 근데 걔가 그걸 어떻게 알어?! ....그래? 정말이야, 그거?
(약간 얼빠진 표정으로)
....알았어, 끊어....쫌 있다 전화할게....
(끊더니 물끄러미 대수를 쳐다보며)
대수야, 있잖아....춘심이두 주환이한테서 들었다는데....
니가 제일 잘 알 거라구 그런다, 얘가....?
얼어붙는 대수의 표정. 땡 종소리에 홱 돌아보면 문 열고 들어서는 소녀. 짧은치마 아래로 드러난 소녀의 무릎 이미지에, 문 도로 닫히면서 울리는 종소리.
84. 상록고 운동장 (낮)
종소리에 이어지는, 자전거의 찌르릉 벨소리. 자전거 핸들에 달린 둥근 벨 클로즈업. 페달을 밟는 소녀의 무릎.
빙글 돌면서 철봉 위로 상체를 곧추세우는 까까머리 소년. 교복 명찰에 ‘오대수’. 어깨너머로 보이는 풍경 - 햇볕이 따갑게 내리쬐는 텅 빈 운동장을, 빨간 자전거 타고 천천히 도는 수아. 요란한 매미울음 소리, 가끔 수아가 괜히 울려보는 자전거 벨소리.
크게 원을 그리는 수아를 따라 팬하는, 소년 대수의 시점 - 어느 순간, 운동장 가운데 서서 이쪽을 보는 어른 대수가, 초점 안 맞은 모습으로 언뜻 스쳐 지난다.
페달 밟는 수아의 다리를 따라 팬하는, 어른 대수의 시점 - 언뜻언뜻 드러나는 수아의 하얀 무릎. 어느 순간 바큇살 사이로, 멀리 철봉 위에 곧추선 소년 대수가, 초점 안 맞은 모습으로 언뜻 스쳐 지난다.
수아, 천천히 운동장을 돌면서 힐긋힐긋 쳐다본다. 소년 대수, 으스대면서 담배를 피워 물더니 철봉에 거꾸로 매달린다. 수아를 바라보며 담배 피우는 대수. 눈길 돌리면, 흰 구름 떠가는 하늘과 철봉, 자기 두 발이 보인다.
대수
(소리)
....어지러웠다....거꾸로 매달려서 담배 피우는 것도
이십 오 년 전 기억을 떠올리는 일도 어지러웠다.
어지럽지만 꾹 참았다.
빙빙 돌면서 가끔 대수 앞을 지날 때마다 피식 웃는 수아, 저만치 다가오는 여선생을 발견하고 고개를 푹 숙인다.
여선생
어쭈, 요놈 봐라....빨리 안 꺼?
대수
(거꾸로 매달린 채 땀방울을 뚝뚝 떨구며)
오늘 전학가요....서, 울....
(연기를 뿜으며)
후우- 마지막으루 정든 교정을 찾았건만....
....신경 끄세요, 미스 김....
당황한 선생 떠나고 수아가 다가와 벤치에 앉는다. 웃옷 벗는 대수, 알통을 과시하며 평행봉에 매달린다. 앞으로 돌고 뒤로 돌고, 가진 재주를 다 보인다. 시집 읽는 틈틈이 손목시계를 들여다보고, 가끔은 대수도 봐주는 수아. 쿵 소리 들린다. 땀에 젖은 러닝셔츠에 잔뜩 흙까지 묻힌 대수, 옆에 와 앉는다. 또 담배를 피워 문다. 한 대만 남은 [은하수]갑을 흘낏 보는 수아.
수아
(귀엽다는 듯)
너 오대수지?
대수
아가씨는 미스....?
수아
(픽 웃으며 귀엽다는 듯)
....여자 애들한테 인기 좋다며?
대수
(으쓱해져서)
인기....라기보다....
수아
얘길 그렇게 재밌게 한다며?
대수
(마지못해 하는 척)
....마라도 못 가봤지? 내가 요번에 다녀왔는데 말야, 거기 가면....
수아
(벌떡 일어나며)
담에 봐.
달려가는 수아 뒷모습을 멍청히 바라보는 대수.
대수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들릴 듯 말 듯)
....전학 간대니깐, 거.....
85. 교실 (낮)
빈 교실에 홀로 앉은 어른 대수. 자기가 공부했던 책상을 손으로 쓸어본다. 고개를 들어 칠판을 본다.
어른 대수의 시점 - 소년 대수가 프레임 인, 칠판 앞에 선다. 분필로 ‘잘 있거라, 3학년 3반 씹탱구리들아!’라고 적는다. 혼자 킬킬거리며 창 밖을 내다보면 저 멀리, 같은 교복을 입은 남학생 하나가 퀀셋 건물 뒤로 사라진다.
교실 창가에 서서 운동장을 내려다보는 어른 대수의 얼굴.
86. 창고 (낮)
운동장을 가로질러 다가오는 어른 대수. 녹슨 퀀셋 건물 출입구에는 커다란 맹꽁이 자물쇠가 걸렸다. 뒤꼍을 향해 걸어가는 어른 대수의 뒷모습.
건물을 돌아서 나타날 때는 소년 대수. 버려진 캐비닛이 깨진 창 아래 놓여 있다. 올라서서 들여다본다.
실내에서 본 앵글 - 창 밖에서 들여다보는 어른 대수.
대수
(소리)
시작했다....되살아나기....기억이....지워졌던....최면으로.
어둠 속에 어렴풋이 보이는 형도의 얼굴, 느린 동작으로 무어라 말을 하는 그 얼굴이 안개 걷히듯 사라지고 나면, 안 쓰는 책걸상들과 잡동사니들이 산더미처럼 쌓인 실내. 차츰 어둠에 적응하면서 수아와 미지의 남자 모습이 보인다.
지켜보는 어른 대수의 얼굴.
다리를 벌리고 앉은 수아, 치마를 걷어올리고 팬티를 내리는 남자. 다리 사이에 손거울을 대주는 남자. 신기한 듯 거울에 비친 자기 성기를 들여다보는 수아. 자기 셔츠 단추를 푸는 수아, 하얀 앞가슴이 드러난다. 사내아이, 입을 갖다대고 가슴을 빨기 시작한다. 손거울을 들고 자기 가슴을 비춰보는 수아.
거울에 반사된 햇빛이 어른 대수를 눈부시게 한다.
간지럽다는 듯 킥킥 웃는 수아. 손거울에 비친 수아의 젖가슴과 남자의 눈. 거울이 조금 움직이면서 대수의 실루엣이 순간적으로 보인다. 홱 돌아보는 남자. 후다닥 달아나는 소년 대수. 캐비닛 위에 떨어뜨린 [은하수]갑.
87. 대수 집 앞 + 운동장 (낮)
이삿짐 트럭에 짐 싣는 사람들. 집안에서 책상을 맞잡고 나오는 대수와 주환. 소년 주환, 다리를 전다.
주환
그래서, 그래서?
대수
어유, 말두 마....아, 글세 그 기집애가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셋이 같이 하자는 거야....그래서 내가
‘얘야, 이 오빤 짐승이 아니란다, 엉!’ 그러고 왔잖냐...
주환
정말 수아 맞어? 확실해?
대수
이름은 못 들었다니까!
그냥 너네 반에, 빨간 자전거 타고 다니는 애야.
갑자기 목장갑을 벗어 주더니 악수를 청하는 주환, 얼떨결에 맞잡는 대수.
주환
그럼....잘 가라.
대수
....어디 가는데?
주환
(돌아서며)
춘심이 만나기루 했어.
대수
너....얘기하면 안돼!
멍청히 서서, 주환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대수.
미도
(소리)
....말 한 마디가 그렇게 큰 죈가?
소년 대수를 지켜보던 카메라가 상승하면서 이삿짐 트럭과 식구들, 대수의 집, 절룩거리며 걸어가는 주환을 보여주다가, 크게 선회하면 집 건너편의 상록고. 운동장 복판에 홀로 선 어른 대수가 조그맣게 보인다. 회상을 마친 대수, 묵묵히 차를 몰고 학교를 떠난다.
대수
(소리)
모래알이든 바위덩어리든, 물에 가라앉기는 마찬가지다.
88. 감금방 복도 (밤)
안대를 한 채 부하의 인도를 받아 걸어오는 대수, 겨드랑이에 졸업앨범을 끼었다.
미도
(소리)
그럼....그 남자애는 누구였죠?
89. 창고 (낮)
손거울에 비친 대수. 이쪽을 돌아보는 남자애, 고개 돌리면서 얼굴이 햇빛에 노출된다. 대수를 보고 놀라는 순간 프리즈 프레임.
대수
(소리)
....이우진은....
90. 감금방 (밤)
디졸브되면, 졸업앨범에 실린 소년 우진의 사진 클로즈업. 그 사진을 들여다보는 미도, 어리둥절해져서 고개 들면 -
대수
....누나와 잤다.
꼼짝도 않고 마주보는 대수와 미도.
91. 펜트하우스 (밤)
넓은 거실 한복판, 전망창 너머 도시 야경을 배경으로, 커다란 의자에 앉은 우진. 초점 잃은 눈, 옆으로 조금 기운 머리. 곁에 선 비서실장, 서류를 넘겨가며 보고한다. 우진을 향해 카메라 전진.
비서실장
....분양 물량 중에서는, 강남지역 역세권의 주상복합 아파트에
향후 육 개월간 최우선적인 관심이 요구됩니다. 따라서 기존 주상복합 아파트 매물 가운데는
비교적 유망매물로 분류되는 도곡동 [파워빌리지] 이 차, 삼 차 물량과 목동 [파인월드]에
총 오십 이 세대, 육백 이십 억 원을 집중 투입하는 것입니다.
새해부터 주상복합 공사 제한에 나서는 서초구 잠원동 일대
[화이트팰리스]는 일 차, 이 차 등은 중저가형 모델로서 상대적으로 낮은 수익성....
얼굴의 극단적인 클로즈업까지 이르면 우진, 들릴 듯 말 듯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다.
92. 감금방 (밤)
인써트 - 탁상용 시계 클로즈업. 날짜를 표시하는 숫자판이 7월 4일에서 5일로 넘어간다.
미도
어디 사는 지도 모르잖아요.
대수
안다.
미도
어떻게?
대수
노루가 사냥꾼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같이, 새가 그물 치는 자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같이
스스로 구원하라....[잠언] 육 장 사 절....
미도
....뭔 소리래, 그게?
93. [맥심빌딩] 앞 (저녁)
높은 빌딩 꼭대기에 해가 걸렸다. 팬 다운하면 택시에서 내리는 대수. 천천히 빌딩 정문으로 걸어가는 대수.
대수
(소리)
에버그린은 자기가 ‘높은 탑에 산다’고 했다.
....그리고 ‘잠언’은 영어로 ‘맥심’....
빌딩 앞에 [맥심 빌딩]이라고 쓰인 큰 머릿돌.
94. 로비 (저녁)
뚜벅뚜벅, 대리석으로 치장된 홀을 가로지르는 대수.
미도
(소리)
그럼 육 장 사 절은 뭐야? ....층수겠지?
육 층? 사 층?
95. 엘리베이터 (저녁)
엘리베이터 안의 층수 버튼 옆에 붙은 리스트에 의하면, 4층부터 6층까지 어느 나라 대사관. 낙담하는 대수.
미도
(소리)
아님, 육십 사 층?
64층은 없다. ‘32’ 위에 ‘P'가 있을 뿐이다. 눌러본다.
여자
(녹음된 소리)
비밀번호를 입력해 주십시오.
(위를 본다. 비상 통화 버튼 위에 다이얼 패드. ‘6’과 ‘4’를 누르자)
잘못 입력되었습니다, 다시 입력해 주십시오.
미도
(소리)
어쨌든 가요....가보면 알겠지, 뭐....
잠깐만....짐 싸는 덴 선수 됐으니까, 뭐....
미도가 트렁크 열고 짐 챙기는 소리.
미도
(소리)
여기두 그럭저럭 지낼 만하던데요? 오랜만에 나 혼자....
이번에는 ‘4’와 ‘6’을 눌러보는 대수.
여자
(녹음된 소리)
잘못 입력되었습니다, 다시 입력해 주십시오.
미도
(소리)
....칫솔은 왜 가져가? 아, 기념품이야 모야....
(갑자기 말 끊고)
어....아저씨?
다이얼 패드를 노려보는 대수, ‘6464’를 누른다.
여자
(녹음된 소리)
잘못 입력되었습니다, 다시 입력해 주십시오.
감금방 문 닫히는 소리. 미도, 달려와 문 두드리는 소리.
미도
(소리)
아저씨....아저씨! 같이 가야지!
야, 이 나쁜 놈아! ....야-!
‘4646’을 누르는 대수 얼굴 위로, 감금방 복도를 울리는 구둣발 소리. 문짝 두드리며 악쓰는 미도 소리가 어렴풋이 들리다가 그나마 사라진다. 거기 뒤섞여 들리는 엘리베이터 녹음 목소리.
여자
(녹음된 소리)
잘못 입력되었습니다, 다시 입력해 주십시오.
말쑥하게 정장한 사람들이 앞을 지나면서 대수를 보고 저희끼리 뭐라 수근댄다. 흐르는 진땀을 닦는 대수. 갑자기 들어서는 허름한 잠바 차림의 사내, 우진이다. 경호실장도 따라 탄다. 시선이 마주치고 서로 조금씩 놀란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대수가 비밀번호를 모른다는 사실을 눈치챈 우진, 픽 웃으며 ‘0604’를 누른다.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떨구는 대수. 말없이 선 세 사나이.
대수
(침묵을 깨며, 자기 앞을 보고 덤덤하게)
....너는 누나와 잤다.
우진
(곁눈질로 대수를 흘낏 보더니 다시 층수표시 전광판으로 시선을 돌리며)
....가서 얘기하죠.
엘리베이터 전광판이 P층을 가리킨다.
96. 펜트하우스 (저녁)
벨소리 들리자, 읽던 잡지를 내려놓고 엉거주춤 일어서는 경호원 둘. 엘리베이터 문 열리고, 우진과 경호실장 내린다. 인사하는 경호원들, 따라내리는 대수를 보고 놀란다.. 대수도 마찬가지. 서로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고 우물쭈물하는 경호원 둘과 대수. 대수와 경호원들을 번갈아 보며 싱글거리던 우진, 말없이 욕실 쪽으로 간다. 경호실장은 집무용 책상 옆에 가 선다.
우진
(걸음을 멈추더니, 갑자기 돌아보며)
....물어!
경호원들, 덤벼든다. 경호원들은 조금 느린 동작으로, 대수 혼자 제 속도로 보인다. 칫솔을 부러뜨리며 달려드는 대수, 뾰족한 끝을 경호원1의 눈에 꽂는다.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는 경호원1. 달려드는 경호원2의 주먹을 피하며 파고드는 대수, 박치기로 코를 박살낸다. 피를 뿜으며 넘어가는 경호원2의 가슴에 나머지 칫솔 반쪽을 박는 대수. 우진과 경호실장, 구경만 한다. 동작을 끊지 않고 그 기세 그대로 달려오는 대수. 물끄러미 바라만 보던 경호실장, 대수가 가까워졌을 무렵 천천히 한 발 내밀고 팔을 들어 공격자세를 취한다. 급정거하는 대수, 경호실장의 빈틈없는 모습을 보자 덤비지 못하고 노려보기만 한다. 서로 닿을 만큼 붙어 선 두 남자. 짧은 침묵이 흐르고, 갑자기 팔을 뻗는 경호실장, 옷자락을 움켜쥐고 어깨너머로 메쳐버린다. 커다란 전망창에 날아가 부딪치는 대수. 몸이 바닥에 떨어지자 심하게 일렁이는 유리, 빠르게 금이 가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무너져 내린다. 대수 몸 위로 떨어지는 파편들. 고층빌딩 사이로 부는 거센 바람이 요란한 도시의 소음과 함께 몰려든다. 욕실로 들어가 버리는 우진. 경호실장, 누워 뒹구는 경호원 둘의 다리를 하나씩 잡고 엘리베이터로 질질 끌고 간다. 짧은 신음소리와 함께 일어서는 대수, 욕실 앞에 가보면, 문이 활짝 열린 채로 바닥에는 벗어놓은 옷가지들, 샤워부스의 불투명 유리문에 비치는 우진의 실루엣. 물소리 들리기 시작한다. 황당한 표정으로 샤워부스를 응시하는 대수. 콧노래까지 부르는 우진.
잠시 후 -
도시 야경을 배경으로 우뚝 서있는 대수, 꼼짝도 않는다. 침실에서 잘 개켜진 새 옷들을 가지고 나오는 경호실장, 소파에 얌전히 놓는다. 물소리 멈추자 돌아보는 대수. 알몸으로 성큼성큼 걸어나오는 우진.
대수
(하던 이야기 재개)
....그리고 내가 소문을 냈다.
(전신거울 앞에 서서 옷 입기 시작하는 우진)
그래서 이수아가 죽었다.
우진
참 잘했어요....참 잘했어요.
(거울에 반사된 대수를 보며 박수)
이렇게 거울로 보니까 그때 생각이 나네, 그죠?
(서랍에서 낡은 [은하수]갑을 꺼내 던져주며)
....상이에요.
받아서, 마지막 한 대를 꺼내는 대수, 불을 붙이고 한 모금 피운다. 얼굴을 찡그리며 카페트에 담배를 떨구고 발로 비벼 끈다. 흰 와이셔츠의 단추를 채우는 우진.
대수
(침까지 뱉고)
최면으로 내 기억을 지워놓고 그걸 찾으라고 했으니
너는 참 비겁하다.
.....내가 이겼으니까 인제 죽어라.
97. 감금방 복도 (밤)
방마다 음식을 넣어주는 간수.
우진
(어처구니없다는 듯, 소리)
기억을 지워요?
(폭소를 터뜨리며)
아니, 여태까지 최면 때문에 그 날 일을 기억 못한다고 생각해 온 거예요?
98. 펜트하우스 (밤)
검정 넥타이에 타이핀을 꽂는 우진.
우진
이래봬도 제법 미래지향적인 인간이라구요. 과거를 지우는 그런 시시한 짓은 안 해.
당신이 그 날 일을 기억 못하는 진짜 이유가 뭔지 알아?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을 기다리는 대수)
그건 말이야....
(조금 뜸을 들이다가 픽 웃으며)
그냥....잊어버린 거야.
싱거운가요? 하지만 진실은 단순한 거거든....
(커프스 버튼을 채우며)
당신은 ‘그냥’ 잊어버렸어.
남의 일이니까....너무 하찮으니까....미안해한다는 건 귀찮은 일이니까....
....누나가 왜 자살했는지 알아요?
당신이 낸 소문이 점점 불어나서 이수아가 임신했다는 데까지 발전했어.
누나는 점점 그 소문에 빠져들기 시작했고 결국엔 그걸 믿어버리게 됐지.
그러더니, 정말 월경이 그치고 배가 불기 시작했어.
자식인 동시에 조카를 임신한 소녀의 기분이 어땠을지 생각해봤어?
(점점 흥분하며)
알겠어요? 당신 혀가 우리 누나를 임신시켰다니까!
이우진의 자지가 아니라, 오대수의 혓바닥이! 흐흐흐흐....
외면하고 싶다는 듯 눈을 감는 대수.
99. 감금방 (밤)
침대 끝에 멍청히 앉았던 미도, 천천히 몸을 돌려 트렁크를 연다. 다 싸놓은 짐을 하나씩 꺼내놓기 시작한다. 옷가지들을 서랍에 넣는다.
우진
(소리)
그래서, 난 이번엔 당신의 미래를 발명하기로 했던 거야....
최면후 암시, 알지요? ....정말 몰라요?
100. 펜트하우스 (밤)
우진
(돌아 서 있다가 서서히 얼굴을 돌리는데, 늘 심각한 대수의 표정과 비슷하다.
말투까지 흉내내며)
....처음 보는 남자를 집에 끌어들이는 너는, 도대체 누구냐.
(얼어붙어 말도 못하는 대수 표정을 살피며)
....설마?
(우스워 죽겠다는 듯)
설마는 뭐가 설마, 당신 둘 다한테 암시를 걸었다니까! 사랑의 암시!
대수
도대체....미도는 왜....
우진
왜라고 생각해?
왜 이우진은, 오대수를 딱 십 오 년만 가뒀다가 풀어줬을까?
검은 정장 차림을 완성한 우진, 부들부들 떠는 대수에게 리본으로 잘 묶인 보라색 상자를 던져준다.
우진
(소리)
왜 이우진은, 하필이면 미도라는 열 아홉 살 아가씨와
오대수라는 마흔 다섯 먹은 아저씨가 퍽fuck 하기를 원했을까? 응?
마지막으로 구두를 신는 우진, 책상에서 가위를 집어 리본을 자르는 대수. 상자 안에 놓인 사진 앨범을 가만히 내려다보는 대수, 마침내 용기가 생긴 듯 첫 장을 넘기면 딸아이 윤이를 안은 대수 부부의 사진, 대수는 빨강 야구모자를 썼다. 눈을 질끈 감는 대수.
우진
(소리)
내 암시는, 둘이 만나서 미도 집에 가는 데까지야.
그 다음은 너희 책임이야, 난 몰라.
엄마하고만 찍힌 윤이, 엄마조차 없이 찍힌 윤이,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조금씩 성장한다. 어느 사진인가부터 미도의 모습이 나타나더니, 결국에는 최근의 대수와 미도를 몰래 찍은 사진들까지.
101. 감금방 (밤)
옷을 다 정리한 미도, 트렁크에 마지막 남은 짐을 꺼낸다. 깃털이 누렇게 변색된 천사의 날개를 펴들고 바라보던 미도, 도로 접어서 품에 꼭 안는다.
우진
(소리)
핏줄끼리는 서로 당긴다는데 말야....
혹시 당신 둘....처음 볼 때부터 알았던 거 아냐?
대수의 짐승 같은 고함 소리.
102. 펜트하우스 (밤)
소리지르며 가위 들고 달려가는 대수, 경호실장에게 붙잡힌다. 달려온 기세를 그대로 역이용해 업어치기. 진열장 유리를 박살내면서 나가떨어진다. 비틀거리는 대수에게 다가와 다시 옷자락을 붙잡는 경호실장. 순간, 대수의 가위 든 손이 아주 빠르게 경호실장의 관자놀이께로 왔다 간다. 우진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없을 만큼 빠르다. 의아해 하는 표정으로 우뚝 선 경호실장, 대수가 든 가위의 날이 부러져 있음을 발견한다, 귀에서 피가 한 줄기 흘러내린다, 눈이 위로 뒤집혀 올라가더니 빠른 속도로 깜빡거리기 시작한다. 가위를 치켜들고 다시 덤벼드는 대수. 가위 든 대수의 오른팔을 역시 오른손으로 척 잡아채는 경호실장, 상대의 힘방향 그대로 끌어당기면 여자 무용수처럼 빙글 돌아 뒤로 안기는 대수. 왼팔로 대수의 목을 두르고 오른쪽 겨드랑이로 자기 오른팔을 넣어 맞잡는 경호실장, 기계처럼 자동으로 움직이는 느낌이다. 오른팔을 치켜든 채 뒤에서 목 졸리는 대수.
우진
(얼굴을 찡그리며)
실장님....
(돌아보지도 않고, 고장난 로봇 같이 눈을 계속 깜빡거리면서
팔에 힘을 더 주는 경호실장에게, 큰소리로)
....실장님!
대수의 뼈마디들이 우두둑 소리를 낸다. 총성이 울린다. 등을 맞은 경호실장, 팔을 풀면서 돌아본다. 영문 몰라하는 표정으로, 권총을 들고 선 우진을 본다. 탄환이 심장을 뚫고 나간 자리에서 피가 흐른다. 옆으로 쓰러지는 경호실장. 느린 동작 - 몸이 왼쪽으로 기울면서 왼쪽 귀에 고였던 핏물이 주르르 쏟아진다. 캑캑거리면서 무릎 꿇는 대수, 등에 입은 가벼운 총상이 보인다. 엘리베이터 도착하자 들어가는 우진.
우진
(손목시계를 내려다보고 밴드를 채우면서)
최후의 질문....
누나하고 나는 다 알면서도 사랑했어.
(고개 들고)
....너희도 그럴 수 있을까?
엘리베이터 문이, 빙그레 웃는 우진의 얼굴을 가린다. 손을 살짝 흔들며 입 모양으로 ‘안녕....’. 일어서 비틀비틀 의자로 가 앉는 대수. 넋이 나간 표정으로 가만히 앉았던 대수, 갑자기 입을 크게 벌리더니 왼손으로 혀를 잡아서 당긴다. 부러진 가위를 쥔 오른손이 천천히 올라가는 뒷모습.
맞은편 빌딩에서 본 모습 - 전망창이 깨져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맥심빌딩] 펜트하우스. 입에서 피를 철철 흘리며 몸부림치는 대수가 조그맣게 보인다.
103. 한계령 (새벽)
앞 씬의 펜트하우스가, 자동차의 룸 미러로 디졸브된다. 오렌지색 불빛을 받은 우진의 두 눈이 거기 비치고, 주위는 어둡다. 잠시 후, 재규어가 터널을 빠져 나오는 순간 -
104. 회상1 - 한계령 (낮)
고속버스 안에서 본 시점 - 터널을 빠져나간다.
수아
(소리)
아저씨, 잠깐만요!
돌아보는 운전사.
잠시 후 -
카메라 앞을 스치고 지나가는 고속버스. 어린 수아 남매가 서 있다. 수아, 격자무늬의 보라색 원피스를 입었다.
105. 한계령 (새벽)
카메라 앞을 스치고 지나가는 고속버스. 재규어 옆에 선 정장 차림의 우진, 천천히 걸으면서 풍경을 음미하듯 둘러보다가 차츰 잰걸음으로. 뛰기 시작하더니 점점 속도를 올린다.
106. 회상2 - 한계령 (낮)
손을 잡고 뛰는 남매, 마주보며 싱긋 웃는다.
107. 한계령 (새벽)
창백해진 얼굴,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뛰는 우진, 얼마 못 가 통증을 느끼고 왼쪽 가슴을 손으로 압박한다.
108. 회상3 - 한계령 (낮)
온통 땀에 젖어 뛰는 남매. 손을 놓치는 우진, 양손으로 무릎을 짚고 서서 허리를 굽힌 채 헉헉거린다. 수아, 멈칫했다가 계속 달린다. 까르르 웃으며 카메라를 스쳐 나가는 누나.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고통스러워하는 우진이 조그맣게 보인다.
109. 한계령 (새벽)
양손으로 무릎을 짚고 서서 허리를 굽힌 채 헉헉거리는 우진. 안간힘을 다해 다시 달리기 시작하는 우진, 미소 띤 얼굴로 카메라를 스쳐 나간다. 멀어지는 뒷모습 - 개미처럼 작아졌을 무렵 비틀거리기 시작하더니 이내 쓰러진다. 다시 일어나 몇 걸음 더 걷다 또 엎어진다. 좀 더 안간힘쓰는 듯하더니 결국 움직이지 않는다. 한동안 지켜보던 카메라, 옆으로 트래킹하면 굵은 나무둥치가 화면을 가리고 지나간다.
110. 숲 (새벽-오후)
트래킹하면서 나무둥치를 지나면, 곧게 뻗은 큰키나무들 사이로 옅게 안개 낀 숲, 고요하다. 바야흐로 시절은 겨울, 가지는 앙상하고 눈은 두껍게 쌓였다. 숲 한 복판, 나무 걸상에 마주 앉은 대수와 형도. 대수, 얼굴은 그대로인데 비해 머리가 많이 세었다. 편지를 읽는 형도. 무척 남루하고 지친 모습으로 고개를 푹 숙인 대수. 두 남자, 숨쉴 때마다 입김.
형도
(고개 들어)
솔직히 내가 선생을 도울 이유는 없지, 안 그래요?
(숙인 채 고개 끄덕이는 대수)
근데 내가 말요, 이 마지막 한 줄에 맘이 움직였다, 이거요.
(편지 내용을 읽으며)
....‘아무리 짐승만도 못한 놈이어도, 살 권리는 있는 거 아닌가요’....
단순한 표현이지만, 공감했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완벽할 지는, 자신 없습니다.
(숙인 채 고개 끄덕이는 대수)
....준비되셨으면 정면에 나무 하나를 응시하십시오.
대수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나무를 본다.
형도
(소리)
안개가 점점 짙어집니다.
(시점 - 안개가 짙어지며)
점점 더 자욱해집니다....점점 더....이제 거의 앞이 보이지 않습니다.
(시점 - 온통 안개로 덮여)
몸이 천천히 떠오릅니다. 올라갑니다....점점 더 빨리....점점 더 높이....
갑자기 주위가 환해집니다, 푸른 하늘입니다.
(시점 - 두리번거리면 푸른 하늘)
결국 그것은 안개가 아니라 구름이었습니다. 당신은 구름 위에 서 있습니다.
(시점 - 발아래 펼쳐진 운해)
당신은 이제 두 사람으로 나뉩니다.
‘비밀을 모르는 당신’의 이름은 ‘오대수’, ‘비밀을 간직한 당신’의 이름은 ‘몬스터’입니다.
몬스터로부터 오대수가 떨어져 나와 지켜봅니다.
(시점 - 빨강 야구모자를 쓴 자기 분신과 마주보며)
내가 ‘천사’라고 말하면 몬스터는 걷기 시작합니다. 한 걸음마다, 일년씩 늙어갑니다.
첫 걸음에 마흔 여섯 살이 되고, 두 걸음에 마흔 일곱이 될 것입니다.
결국 ‘비밀을 간직한 몬스터’는 일흔 살에 죽게 됩니다.
비밀을 모르는 오대수만이 살아남을 것입니다.
걱정할 건 없습니다, 매우 편안한 죽음이니까요.
준비됐습니까? 신호는 ‘천사’입니다.
자- 천....사....
대수의 시점 - 구름을 밟고 한 걸음 떼기 시작하는 자기 분신.
멀리서 본 광경 - 한 발 한 발 걸어가는 대수의 모습이 조그맣게 보인다. 서서히 안개가 걷힌다. 대수, 차츰 허리가 굽는다.
멀리서 본 광경 - 대수, 마침내 쓰러진다.
잠시 후 -
눈밭에 누운 대수, 눈을 뜬다. 두리번거리다 일어나 보면 안개는 다 걷혔고, 오후 햇살에 나무 그림자들이 길게 드리워졌다. 멀리서 발소리 들리기 시작한다. 돌아보면 사람 하나가 나타난다. 가까워지자 미도임을 알아볼 수 있다. 하얀 입김을 뿜으며 다가오는 미도, 환한 미소를 보낸다. 가만히 서서 그녀를 맞는 대수.
미도
(대수 머리카락을 쓸어보며, 안타까이)
왜 이래....이게 모야....
(눈물까지 그렁그렁. 보일 듯 말 듯 쓴웃음 짓는 대수.
대수의 뺨을 쓰다듬는 미도, 대수 손을 끌어당겨 자기 뺨을 쓰다듬게 한다.
한 방울 매달렸던 눈물이 손등에 닿는다)
왜 일루 오라구 했어요?
(멍청한 표정 뿐 대답이 없다. 미도, 대수 뒤를 보며)
....누구랑 있었어?
(대수 돌아보면, 저만치 놓인 의자 2개.
자기와 걸상 사이 눈밭에 직선으로 난 발자국, 스물 몇 걸음 걸어온 흔적이다.
대수, 고개 젓는다.
어리둥절해하는 미도, 코트 깃을 세우고 추위에 몸서리치는 대수를 보고)
....갈래요?
(고개 끄덕이는 대수. 팔짱을 끼고 걷기 시작하는 남녀의 롱 쇼트.
한동안 걷던 미도, 갑자기 걸음을 멈춘다.
덩달아 서서, 의아해 하는 눈길로 돌아보는 대수.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대수 목에 매달려 입맞추는 미도. 꼭 끌어안고 키스하는 남녀의 롱 쇼트.
오랜 키스를 끝내고 얼굴을 떼는 대수. 미도 어깨 너머, 대수의 얼굴로 카메라 전진.
대수의 시점 - 멀리 의자 2개, 거기부터 혼자 걸어온 발자국, 그 끝서부터 둘이 걸어온 발자국.
품에 파고들면서 미도, 속삭이듯)
....사랑해요, 아저씨.
화면에 얼굴이 꽉 찼을 무렵 대수 입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새로 해 박았는지 치열도 가지런하다. 환하게 웃는 대수의 얼굴, 프리즈 프레임된다. 어찌 보면 우는 얼굴 같기도 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