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깨비 Episode_11
써니 씨의 전생 속 얼굴이 네가 가진 그 족자 속 여인의 얼굴과 같았어.
확실해? 뭘 봤는데?
내가 본 그 여인은 궁 한가운데 서 있어. 흰 옷을 입었고 지체가 높아 보여. 가슴에 활을 맞았고 피를 흘리며 쓰러졌어.
그건 내가 얘기 해줬잖아, 흰 옷 까진 아니었더라도 활 얘기..도 내가 안 한 거 같긴 한데. 다른 건? 다른 거 더 본 거 없어?
가마를 타고 가다 누군가를 보며 웃었어, 작은 창문으로 웃으며 물어, 저 오늘
저 오늘 예쁩니까?
그녀의 물음에 대답하는 목소리가 하나 있어. 못생..
못생겼다.
네 여동생이 맞아?
맞아.
그럼 이제 어떻게 돼?
★
어서 오세요.
알바생 지금 배달.. 갔거든요?
선아.
댁은 또 내 이름 왜..
선아..
미친 거 아니야? 보고만 있을 거예요?
아직은 정확하지 않으니 스킨십은 자제를..
네가 정녕 선이냐?
선이면 뭐요, 이 사람 왜 이래요?
그게 깊은 사연이..
내가 이 오라버니랑 사연 깊을 게 뭐가 있어서.
그래, 그래 나다. 내가 네 오라비다. 보고 싶었다, 선아.
써니라니까!
그리고 우리 안 보기로 한 거 아니었나? 아니, 무슨 남자가 계란 후라이 얘기를 듣고도 같이 다녀요?
그게.. 이 자가 전생에 써니 씨 오라버니였어가지고..
허.. 뭐, 뭐라고요? 뭔 생? 허, 미치겠다. 그런 되도 않는 전설의 고향 만들어서 나 보러 온 거예요? 보고 싶긴 했나 봐.
나 누구랑 얘기하니, 선아. 정녕 아무 기억도 나지 않는 것이냐?
옷도 말짱하고 얼굴도 말짱하신 분이 참.. 그래요, 뭐 들어나 봅시다. 내 전생이 뭐였는데요?
고려의 황후였다. 나는 무신이었고.
아.. 고려.
기억이 난 것이냐?
딱 기억나네. 군고구마 값 오천 원, 딱 내놔요! 전생? 황후? 믿을래도 진짜! 나가, 안 나가? 당신도 나가!
선아!
어, 두 분 언제 오셨어요? 왜들.. 무슨 일 있어요?
알바생, 소금 뿌려, 저쪽에 한 포대 있을 거야.
그게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지 잘 몰라겠어가지고..
모르면 마요.
네.
선아..
아니, 무슨 일인데요?
★
정보 좀 교환하죠? 김신 씨랑 우리 사장님, 뭐예요? 옛 여친은 아닌 것 같고. 옛 여친이면 저승 아저씨가 이러고 있을 리가 없잖아요. 막 어둡고 그래야 하는데..
어, 전혀 아니야. 그런 쪽은. 내 질문은..
비밀!
아직 안 물었어.
니네 사장님 혹시 찾아오는 다른 남자는 없으시니? 뭐 그런 거 물으실 거잖아요.
근데 왜 비밀이야? 나는 다 말했는데, 넌 왜 비밀이야!
의리! 흥!
★
네가 즐겨 먹던 홍시다, 선아. 네가 갖고 싶어 했던 꽃신이다, 선아. 네가 좋아하던 색깔이다, 선아.
후우, 저 이 색깔 안 좋아하고요, 꽃신 안 신구요, 홍시 안 먹구요. 보시다시피 테이블이라곤 요고 하나 남았거든요, 장사가 잘 돼서.
그건 내가 다녀가서 그렇다. 내가 무신이라.
허어.
아주 여기서 사시네.
가려던 참이다. 일찍 들어오고.
허, 알바생, 너 저 남자 아니면 안 되겠니? 꼭 만나야겠어?
네?
꼭 그래야겠으면 가서 전해. 홍시, 꽃신, 비단 이딴 거 사올 거면 빈손으로 와서 그 손에 치킨이나 들고 가라고, 그게 널 위한 길이라고.
흐흐, 아이 그러게요. 저 양반이 왜 저러지?
하으.
으, 참.
★
내가 우리 사장님을 두고 이런 상상을 하는 게 정말 죄책감 들고 싫지만 오빠네 삼촌이 아주 우리 가게에 와서 산다니까요? 난 괜히 저승 아저씨 눈치 보이고.
그건 니네 사장님이 전생에 우리 삼촌 여동생이라 그래.
응?
왜?
전생이요? 에이, 말도 안 돼. 근데 그걸 오빠가 어떻게 알아요?
내가 비밀 하나 알려줄까?
네.
저승사자들은 인간과 손이 닿으면 그 사람의 전생이 보이거든요.
오 진짜요?
둘이 손을 잡은 게 분명해, 그래서 끝방 삼촌이 알려준 거고.
어, 맞아요! 둘이 손 잡은 거 봤어요! 아, 대박!
★
그 여인, 내 누이 확실해? 뭐, 더 본 거 없어?
없어. 안 그래도 한 번 더 시도하였으나 ‘내가 차일게요.’ 해서 실패했어. 너무 서운해 마. 써니 씨는 전생의 기억이 없잖아.
그러니까.. 그 여인이 전생의 선이라 한들 그 여인에게 난 그저 전설의 고향일 뿐이니.. 그 여인에겐 현생의 삶이 있는 거고.. 지나간 것은 지나간 것으로 둬야 하지 않나 싶기도 하고.. 그때 다 해 줬으면 좋았을 걸.. 누이와 나의 시간이 같았을 때.. 참 조신하고 단아하고 품위 있는 아이였는데 어찌 그리 다른 품성으로 쯧쯧쯧..
써니 씨 품성이 어디가 어때서? 다짜고짜 ‘선아’ 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아니다? 아니면 좋겟다?
헤어진 거 아니었어? 왜 발끈해? 혹시 뭐 다시 만나보자 그런 생각이면 접어라. 어디 저승사자 주제에 인간인 내 누이한테 얼쩡거려?
아까 그 생각 좋은 것 같아. 지나간 것은 지나간 것으로 두자.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죽게 전에) 절대 안 돼! 내 누이한테서 떨어져! 물 있음 확 끼얹는 건데!
나 이 드라마 아는데.. 아침에 많이 봤는데..
★
알바생, 너 혹시 전생 뭐 그런 거 믿니?
네.
믿어?
인간에겐 네 번의 생이 있대요. 씨를 뿌리는 생, 뿌린 씨에 물을 주는 생, 물 준 씨를 수확하는 생, 수확한 것들을 쓰는 생. 이렇게 네 번의 생이 있다는 건, 전생도 있고 환생도 있다는 뜻 아닐까요? 사장님이나 저나 지금이 몇 번째 생인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음.. 그럴싸한데? 어디서 주워 들었니?
저 원래 이 말 저 말 잘 주워 들어요.
또 더 주워들은 말 뭔데?
닿지 못할 걸 알면서도, 다 알면서도 나는 나아가는 것 밖에 할 게 없었어. 그 자리는 내 마지막 전장이었고 난 거기서 죽어야 했었으니까.
대체 왜..
어명을 어기고 돌아왔고, 어린 왕의 질투와 두려움을 간과했고, 여를 지켜달란 선황제의 당부가 잊히지 않았고, 간우들의 죄 없는 목숨을 살려야 했고, 무엇보다 내 누이가 죽음으로 그 멍청이를 지키고 있었으니까.
김선이라는 분은 사랑 앞에서 아주 용감했다는 거요.
앞장 서, 알바생.
전생에 내 오라버니라고 주장하는 그 남자 집으로.
네?
★
다녀왔습니다. 손님이 오셨어요, 여러분.
같이 살아요, 둘이?
이렇게 셋이.
근데 여기 무슨일로?
‘앉으세요.’가 먼저죠. 앉으세요, 사장님. 뭐 마실 거 드릴까요?
술 있니? 소주.
네?
맥주 있습니다, 저희는 맥주 밖에 안 마셔서.
나한테 말 걸어도 된다고 안 했는데.
죄송합니다.
쯧쯧쯧, 어찌 저런 성품으로.
쓰읍!
내가 여동생이라면서요?
전설의 고향이라면서.
근거 대봐요. 여기 휘둘리는 나도 난데, 다 큰 남자 둘이 나 놀려먹자고 편 먹은 건 아니겠거니 싶어서.
이게 근거예요? 뭐 어디서 샀는데요? 인사동? 흠.. 이 사람이 그 왕비예요? 그쪽 여동생?
신기해라, 사장님 맨날 임금님 기다리셨는데.
뭔가 떠오르는 것이 있는지..
그냥, 어리고, 예쁘다? 난 이 나이 때 못난이였는데. 그래서 이 왕비는 어떻게 됐어요?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나요?
두 분 말씀 나누세요. 우린 자리 비켜주죠.
불행했어요? 이 왕비?
얼굴 본 날보다 서신으로 보는 날들이 더 많았다. 누이가 보낸 서신을 읽는 시간만이 하루 하루 살아남기 바빴던 날 들의 유일한 버팀목이었다.
★
명중이요!
변방의 김신이 승전보를 전해 왔습니다.
국경의 김신이 승전보를 전해 왔습니다.
요동의 김신이 승전보를..
김신의 승전보가 부러 저잣거리를 들렀다 오니 우매한 백성들은 매양 놀아나고 문신들의 원성은 극에 달합니다. 장하다 마시고 황실의 체면이 저잣거리에 나앉으니 네 누이의 안위를 근심한다 기별 하시옵소서.
아.. 무예엔 소질이 없으시구나..
벌써 한 식경 째 같은 책만 보고 계시는구나.
글 공부에도 소질이 없으신가 봅니다.
아니다, 심중에 상심이 있으신 모양이다. 흠.. 그나저나 어찌 한 번을 안 찾아오고, 진짜 여인을 병들게 하는 분이시다.
폐하 드십니다.
어! 어?!
무거운데..
아! 무정하신 어떤 분이 심중에 계시어..
어딜 그리 급히..
폐하를 뵈러..
내가 갈 것인데.
서로 오면 더 좋을 듯 하여..
미천한 것을 쥔 손아귀에는 힘을 적당이 주어야 하는 법입니다. 소중해 꼭 쥐고 나면 그 미천하고 소중한 것은 반드시 죽습니다. 그 손에 의해.
안 된다! 절대 안 된다! 황후의 처소에 그 어떤 탕약도 들이지 마라! 어명이다! 황후는 그 어떤 탕약도 마시지 마라! 어떤 이가 보내든 절대 마시지 마라!
어찌 저러실까요, 마마 섭섭하시게..
문을 열어라! 개선장군 김신 장군이시다! 하하하!
그대의 오라비가 또 개선을 하였구나. 그대는 우리 둘 중 누가 살았으면 좋겠느냐.
폐하..
대답해 보거라. 아님, 이미 계산이 선 것이냐, 하긴 그대는 내가 살든, 오라비가 살든 잃을 것이 없구나.
못나셨습니다.
죽고 싶은 것이냐! 꼴은 왜 그러는 것이냐, 하.. 이미 그대 마음엔 초상이 났구나. 나는 이제 알 수가 없다. 변방의 오랑캐가 적인지, 네 오라비가 적인지.
박중헌이 적입니다.
선택해야 할 것이다. 내 여인으로 살 건지, 대역 죄인의 누이로 죽을 것인지.
오래오래는 아니었지만, 행복했던 순간도 있었던 듯싶고, 눈을 감는 마지막 순간에도 그 멍청이만 보고 있었으니까..
하아.. 그럼 왕은요? 그 왕도 환생 했어요?
그건.. 모르지.
어떻게 생겼는지 얼굴이라도 보고 싶네. 잘 생겼어요?
그대가 내 누이라면 한결 같은 게 하나 있긴 있네.
근데요, 왜 꼭 다 기억하는 사람처럼 애틋하고 절절하게 얘기하죠? 마치, 생이 그때부터 쭉 이어지고 있기라도 한 사람처럼.
안 믿겠지만, 그 기억을 고스란히 안고 살아 왔으니까..
흠.. 안 믿는 거 안다니까 하는 얘긴데, 전생을 믿어서가 아니라 홍시, 꽃신, 비단 땜에 와 봤어요. 그런 거 못 해준 게 한으로 남았나 싶고.. 미친놈인 건 확실한데 곱게 미쳤네 싶고.. 그래서 좀 짠했네요. 이럴 때 보면 선이가 맞는 것도 같고. 전생에 오라버니였다고 이렇게 갑자기 말 놓고 그러지도 말구요. 지방 사는 형제도 간만에 보면 어색한데, 생을 건너온 오라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을 갑자기 어떻게 반가워 하겠어요. 그러니 너무 서운해도 말고요. 실례 많았어요. 그럼. 이 남자는 나와 보지도 않네.
★
잡지도 않을 거면서 왜 보고 있어요?
잡아도 되나요?
잡으면요, 그 다음엔, 우리 어떻게 되는데요? 하아, 못났다 진짜.
★
너인 것이냐, 아닌 것이냐.
잘 갔어?
그 여인은 늘 참 잘 가.
괜찮아?
뭐.. 궁금한 게 있는데, 그 족자 말이야. 누가 그린 거야?
왕여가. 누이의 모습이지만 그 자가 본 모습이고. 그 자의 한, 죄, 그리움이 담겼지, 그 족자는. 아마도 그것이 그 자의 마지막 행보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렇게 다 죽여놓고?
그렇게 다 죽여놓고..
★
알바생?
네, 저예요. 이러고 계실 것 같아서..
전생 뭐 아무것도 아닌 줄 알았는데, 믿지도 않는데, 그 집 벗어나니까 몸살처럼 온 몸이 아픈 거 있지.
힘드시면 말씀하세요, 병원 가요.
아니, 집에.. 아무것도 없는데 자꾸만 여기가 아파. 아니 더 깊은 곳이 아파. 무정한 누군가가 심장 속을 걸어가. 그래서 심장이 내려 앉는 것 같아.
가요, 밖에 추워요.
★
어?
왜.. 어, 옥탑방 사시는 분이야.
아, 네.
어, 어..
계단 조심하세요.
아랫집 여자가 도깨비 신부님이랑 지인이었다니.. 세상 참 좁다, 좁아.
★
그 사람 핸드폰에 있던데..
뭐가요?
도깨비 내외. 오라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과 너야? 도깨비 내외가? 말 안 해 줄 거지? 그 사람들 정체.
죄송합니다.
그 사람도 말 안 하겠지? 자기 정체.
죄송합니다.
흠.. 헤어져야겠지? 넌 그냥 사람이야?
네.
알았어.
★
뭐 하세요?
마중 나왔지.
어디서부터?
네가 걸어온 모든 걸음을 같이 걸었지.
말 예쁘게 하는 것 봐. 사장님 인생도 참. 나야 태어날 때부터 이상한 나라의 지은탁이었으니까, 귀신을 보든, 도깨비가 나타나든, 저승사자를 맞닥뜨리든 이상할 게 없었는데 사장님은 갑자기 진짜 이상한 장르가 낀 거잖아요. 전생에 오빠라는 사람은 도깨비고, 좋아하는 남자는 저승사자고, 알바생은 귀신이나 보고, 가게에 손님보다 귀신이 더 많을 때도 있다니까요? 전생, 대체 뭘까요?
그저 지나간 생이지.
나도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어느 순간에 김신 씨 인생에, 잠깐 머물다 갔을까요?
글세.
아 우리 사장님이 진짜 아저씨 여동생이었으면 좋겠다. 우리 사장님 진짜 좋은 분.
아니던데?
역시 남매는 현생이나 전생이나 티격티격 인가? 나도 김신 씨 같은 오빠 있었으면 좋겠다. 아! 나 오빠 있지? 태희 오빠!
너 아주 그러다 나중에, 어? 둘이 캐나다 가서 소 사주러 그 레스토랑 가겠다? 어?
아, 내 단골 집?
두 번 가놓고 단골 집은 네 단골집이야? 나 거기 50년 전부터 다녔거든?
딴 사람이랑은 안 갈 건데? 아저씨랑만 갈 건데?
웃기시네! 가던데? 흥!
내가요? 진짜요? 언제요? 어, 어떻게 알아요?
괜히 데리러 왔어! 괜히 데리러 왔어!
어떻게 알아요?
★
같이 찍자.
야 들어와, 들어와, 들어와.
뒤로 가지 마라! 하나, 둘, 셋!
한 번만 더, 각을 좀.
다시, 다시, 다시.
사진 찍자! 모델 포즈, 모델 포즈.
TEXT ON THE SCREEN
010-XXXX-1209
여보세요?
내 번호야.
내 번호 어떻게 알았어?
새 학기가 시작되면 반장한텐 비상 연락망이라는 걸 준단다. 넌 받아본 적 없겠지, 3년 내내 내가 반장이었으니까.
어.
졸업 축하해. 가끔 전화하자.
그래, 너도 축하해.
자, 다들 착석! 사복들 입으니 의젓하네? 3년 동안 모두들 수고했어. 물려준 교복들은 후배들한테 잘 전달할 거고. 뭐, 담임 얘기 길어야 지루할 테니까 여기서 끝! 졸업들 축하한다! 아, 저기 밖에 계신 부모님들, 들어오셔서 축하한다, 고생했다, 안아 주세요. 네, 수진이 어머니. 네, 안녕하셨어요? 어서 오세요. 어우, 지수 어머니! 안녕하셨어요?
고생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아유 감사합니다. 고생하셨어요. 네, 어서 오세요.
고생 많았어. 엄마가 엄청 자랑스러워하실 거야.
집에 가서 가족들이랑 나눠 먹어 꼭!
저를 왜 안아 주세요?
이뻐서, 너 점지할 때
행복했거든
행복했거든. 쉿. 졸업 축하해! (목화 꽃다발 - 목화의 꽃말 : 어머니의 사랑)
아가, 더 나은 스승일 순 없었니? 더 빛나는 스승일 순 없었어?
아, 왜 이러지.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
추워, 아이구, 자요. 자요. 맛있게들 자셔요(드세요).
고맙소.
백 년에 한 두 명. 전생과 같은 얼굴로 태어나는 사람들이 있다.
TEXT ON THE SCREEN
조선 후기 철종 12년
어찌 그러셔요 나으리? 무에(무엇이) 불편하셔요?
아니다. 이젠 하다 하다 저 먼 생도 앞서 보는구나.
먼 생이요? 얼마나 먼 생이요, 나으리?
분명 조선 말을 쓰는데 미리가(조선 시대에 미국을 일컫는 말) 말이 섞인 것이 세계가 하나라도 된 것인가. 알다가도 모르겠구나. 그 뿐이 아니다. 벼루 반 만한 고철을 갓 태어난 아기 대하듯 어루만지고, 연모하는 이를 대하듯 소중히 지니는구나.
아, 무슨 말씀인지 저는 도통..
시커멓기도 하고, 시퍼렇기도 한 것이 아주 널리 쓰일 모양이다. 기억하거라. 이렇게 생겼다. 찰칵! 찰칵! 투자할 일 있음 크게 하거라.
예 나으리.
★
예쁘다.
엄마, 잠깐 이것 좀 들고 있어봐.
하아, 머물다 갔네, 나도 모르던 순간에.
★
뭐 하시는 거예요?
신기해서, 어떻게 그때부터 널 보았을까?
언제요? 아까 교실에서요?
아니, 훨씬 더 멀리서. 있어, 이상하고 아름다운 어떤 일.
구체적으로 뭐요?
조선 후기 철종 12년. 만났더구나.
누굴요?
첫사랑.
하아, 나 이 양반이, 안물안궁이거든요?
그건 어디서 나오는 글귀냐? 논어도 아니고, 맹자도 아닌 것이.
갤에서 나옵니다, 갤. 안 물었다고요! 안 궁금하다구!
난 궁금하다, 이 꽃 어디서 난 것이냐? 혹시, 그 태희인가 뭔가 하는 그 자식이..
태희 오빠 안 왔구요, 왔으면 같이 있지 그냥 안 보냈구요, 저한테도 풀 같은 거 주시는 지인이 다 있구요. 놀지 마시고 사진이나 좀 찍어 주시구요. 자 이거를 누르면은 찰칵 소리..
알아.
오, 의외인데? 와, 나 졸업 기념사진 한 장도 없는데 평생 간직해야지.
야, 넌 뭐 사진 한 장 찍는데 사연이.. 이래서 사진 찍어 주겠냐? 움직이지 마!
아이, 하나 둘 셋 하고 찍어 줘야지, 그렇게 그냥 찍는 게 어디 있어요?
그렇게 찍어도 예뻐.
치.. 우리 학교 되게 좋죠?
좋네.
되게 싫은 것도 몇 가지 있었는데요, 되게 좋은 것도 있었어요. 좋은 건 원래 늦게 찾아오나 봐요. 아저씨처럼.
일찍 왔는데 몇 반인지 몰랐어.
말구요.
혼자 왔다고 섭섭해하지 말고, 덕화는 출근했고, 저승 그 자는 지금 심경이 매우 불편한 중이라. 다들 축하는 한대.
그럼 저 두 분은 누구죠?
저 둘은 졸업식을 온 게 아니라 졸업식에 올 누군가를 보러 온 거 같은데.
대박, 그럼 우린.. 아저씨! 문! 문! 오픈!
★
졸업 축하하러 오셨나 봐요.
그건 핑계구요, 딴 사람 보러요. 다행히 제 앞에 서 있네요. 얼굴 보면 결심이 설 것 같아서 와 본 건데 얼굴 보니까.. 그냥 좋네요.
전에 한다던 조사는요? 끝났어요? 왜 내용 공유 안 해요? 난 그거 들으러 온 걸로 할 건데?
아직..
그럼 다음 번엔 조사 마치고 반지 돌려받을 겸 마주치는 걸로 하죠. 이건 우리 알바생 갖다 줘요, 그럴려고 사온 거니까. 이걸 왜 날 줘요?
그러려고 사 온 거라. 제가 누구든, 한 번 쯤은 꽃이라는 걸 주고 싶어서.
누군데요, 김우빈씨..
믿지 않으시겠지만, 저도 잘 모릅니다. 내가 누군지..
그 댁 분들은 주로 믿을 수 없는 말을 하고 믿을 수 없는 존재들 인가 봐요. 이 관계 정말 답 없네요. 안 그러길 바랬는데, 결론이 자꾸 비극 쪽이네.
★
선물. 이제 졸업도 했고, 어른이고 하니 필요한데 써.
이거 아직 못 써요. 이거 법적으로 우리 이모 허락이 있어야 돼요.
그래서 법적으로 양도 받았어. 이제 네 거야.
진짜요? 우와, 어떻게요? 감사합니다.
내가 아니라 엄마가 주시는 거야. 나야 대신 전해주는 거고.
그래도 감사해요. 하, 어떡해, 나 이거 한 푼도 못 쓸 거 같은데. 엄마가 준 거 아까워서 하나도 못 쓸 거 같은데.
필요한 데 써. 그러길 바라실 거야. 엄마 없이 이 세상을 혼자 살아갈, 아홉 살짜리 딸을 생각하며 남긴 간절한 기도 같은 거 였을 테니까.
근데 우리 이모네는요? 잘 지내요?
★
어우, 추워.
어우 얼굴 땡겨. 로션 거지 같은 거 썼더니.
아우, 왜 지은탁 그게 생각이 안 나가지고, 이 년을 어디 가서 찾지?
이젠 못 찾지. 졸업도 했을 텐데.
대학 붙었겠지, 인서울 뒤지면 나올 거야.
오.
아, 대학. 이게 콩밥을 먹더니 이제야 제대로 머리가 돌아가는구나.
아주 콩밥 체질이네, 체질이야.
넌 수시로 먹어야겠다. 일단 자! 가자.
근데 그 돈도 홀랑 쓴 거 아니겠지?
야, 돈도 써 본 년이 쓰는 거야. 걔 그 돈 절대 못 써, 지 엄마 생각나서. 찾기만 하면 돼.
엄마, 배고파. 뭐 좀 먹자.
맥주 한 잔 할래?
자야지. 표정 보니 좋은 결론은 안 났나 봐. 기껏 자리 피해줬더니.
나도 난데, 너도 너라..
뭔 소리야?
명부가 왔어.
유회장?
아니, 기타 누락자. 2주 뒤 추락사야. 넌 안 보이겠지만.
고맙다, 알려줘서.
그게 다야? 화 안내? 신 욕 안 해?
이런 게 몇 번이고 몇 십 번이고 찾아올 텐데, 그때마다 놀랄 순 없지.
흠, 그것도 그러네.
그러니까 검 뽑고 무로 돌아가, 평안 속으로. 안 그럼 그 아이 앞에 자꾸 죽음이 닥쳐 올 거야. 그 모든 순간을 막을 수 있겠어?
막을 수 있을까?
결국엔 막지 못하는 순간이 올 거야. 그럼 은탁인 목숨을 잃게 되고 넌 무로 돌아갈 기회를 잃게 돼. 다시 천 년을, 혹은 불멸을 살아 겪는 그 지옥을 넌 살아가야 해. 어리석은 선택이야 .그러니까 검 뽑고 무로 돌아가. 슬프지만 그게 최선이야.
최선을 다 하지 않아보려고. 좀 슬프긴 하네.
★
무슨 일 있어요? 이게 뭔데요?
명부.
누구요? 아저씨요?
아니, 너.
저요? 저 죽어요?
지금부터 내 얘기 잘 들어. 그 동안 너한테 숨겼던 얘기야. 너한테 아무것도 숨기지 말랬는데 그래도 숨겼던 얘기야. 근데, 이제 더 이상은 숨기면 안될 것 같아서 말해 주려고 해. 너는 내 검을 뽑지 않으면 네가 죽어. 그런 운명을 가졌어. 네가 도깨비 신부로 태어나면서부터. 네가 검을 뽑지 않으면 자꾸 자꾸 죽음이 닥쳐 올 거야. 이렇게..
그러니까 내가 아저씨 검을 뽑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죽는다구요? 계속, 계속.. 혹시 그럼 그 동안 사고들..
응. 납치됐을 때, 스키장에서 너 쓰러졌을 때, 네가 모르는 면접 날 있었을 대형 사고 그리고.. 내가 너 죽일 뻔 했을 때.
하아, 신은 아저씨한테도 나한테도 너무 가혹하네요.
★
하아, 뭔 놈의 운명이 참..
★
아저씨. 그냥 내가 죽을래요. 아저씨는 계속 계속 살 테니까 내가 환생해서 아저씨 만나러 올게요. 여기 꼭 있어요. 내가 찾아올게요. 약속할게요.
그럴까?
아저씨 그냥 검 뽑읍시다. 나 죽으면 아저씨 영원히 혼자 살아야 하잖아요. 신부가 안 나타날 수도 있잖아요. 그냥 내가 검 뽑아 줄게요. 그게 좋겠죠?
하아, 그럴까?
아저씨, 그냥 우리 같이 죽어요. 그게 좋겠어요. 한 날 한 시에. 누구 하나 혼자 남지 않게. 누구 하나 혼자 남지 않게, 누구 하나 맘 아프지 않게.
지은탁, 나 봐. 너 안 죽어. 안 죽게 할 거야. 내가 막을 거야. 내가 다 막을 거야. 미안해. 이런 운명에 끼어들게 해서. 하지만 우린 이걸 통과해 가야 돼. 어떤 문을 열게 될지 모르지만 네 손 절대 안 놓을게. 약속할게. 그러니까 나 믿어. 난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큰 사람일지도 모르니.
★
어디 가, 너 지금 위험하다니까.
어디 가긴요, 알바 가야죠.
내 말을 뭘로 들은 거야.
다 잘 알아 들었어요. 그치만, 계속 이렇게 집에만 갇혀서 살 순 없어요. 이 집에 갇혀서 덜덜 떨면서 오래 살면 그건 사는 게 아니니까. 내일 죽더라도 전 오늘을 살아야죠. 알바를 가고, 대학 입학 준비를 하고 늘 걷던 길을 걷고 그렇게 집으로 돌아오구요. 그게 삶이라는 거니깐. 그러니깐 아저씬 죽어라 저 지켜요. 전 죽어라 안 죽어 보려니까. 나 아저씨 믿어요. 엄마가 날 어떻게 낳았는데요, 내가 어떻게 붙은 대학인데요. 살 이유가 너무 많아요. 그 중에 도깨비 씨가 특히 절 살게 하구요.
알았어, 알았으니까 위험하다 싶으면 꼭 나 소환하고, 어디 높은 데 절대 가지 말고. 알았어?
아, 추락사랬지? 네, 걱정 마세요. 다녀오겠습니다.
아니, 가로등이 깜빡 깜빡하는 게 너무 위험해서.
아니, 저 남자 너무 잘 생겼잖아요, 잘 생긴 남잔 너무 위험해서.
아니, 저 옷 너무 심하게 예뻐. 예쁜 옷은 내 통장이 위험해서.
아니, 아저씨가 너무 보고 싶어서. 숨이 안 쉬어져서, 너무 위험해서.
나도.
이젠 별게 다 보이네? 하다 하다 한 겨울에 꽃 핀 걸 보고 있는 거야, 나 지금? 얘! 너 죽으려고 환장했니?
★
키가 대략 184에.. 신발 높이 2센치 포함하면 대략 이 높인가? 이게.. 정체였구나. 근데 여전히 모르겠다. 당신, 대체 뭐예요? 아, 미치겠다. 어떻게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일이.. 이렇게 말도 안 되니깐 또 모든 게 말이 되고, 내 이름을 어떻게 알았는지, 이름이 왜 없었는지, 왜 그렇게 모든 게 오답이었는지. 나한테 뭔 짓 했었죠, 전에.. 지금은 하지 마요, 그게 뭐든.
안 하겠습니다. 그냥 들킬게요.
뭔데요, 당신 대체.. 뭐냐구..
저는, 저승사자입니다.
뭐라구요?
안될 줄 알면서 해피 엔딩을 꿈 꿨습니다. 하지만 역시 비극이네요. 우리 그만 헤어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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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티 아까 끝났고 수강신청은 방금 끝났고 지금은 캠퍼스 투어 중입니다.
TEXT ON THE SCREEN
새 매시지
깨비아저씨
오티 아까 끝났고
수강신청은 방금
끝났고 지금은
캠퍼스 투어
중입니다^^
보고 싶어요 ㅠㅠ 해. 하트 하트.
사랑해요 하트 하트 해. 하 낭만적이야.
나도 한 때 있었지, 따뜻한 봄 날. 하지만 구천을 떠도는 지금은 한 없이 깊고 어두워서 매일 매일 추운 겨울 밤 속을 살고 있을 뿐이지. 네가 그 자식 딱 한 번만 만나주면 좋을 텐데. 궁금한 거 딱 하나만 물어봐 주면 좋을 텐데.
궁금한 거? 뭐? 너, 나 사랑하긴 했니? 뭐 그런 거? 하, 낭만적이야.
좋아요! 그 겨울 밤 한 번 끝내 봅시다! 복수하러 가요, 어떻게 해줄까요? 그 자식.
불 낼 거야?
유비무환(준비가 철저하면 근심이 없다)이니까.
★
무슨 일이시죠?
제가 돌아가신 아내분 일로 드릴 말씀이 좀 있는데요, 이정화씨. 시간 괜찮으시죠?
제 아내와는 어떻게..
용건만 간단히 말씀 드릴게요. 이정화씨가 전해 달라는 얘기가 있어서요.
예, 얘기하세요.
잘 지냈어?
잘 지냈어?
희진이랑은 보기 좋더라?
희진이랑은 보기 좋더라? 라고 하시네요.
누가요?
아내분이요.
아하, 희진이는 어떻게..
집에 데려왔었잖아.
집에 데려왔었잖아.
둘이 200일 되던 날.
둘이 200일 되던 날.
백 예쁜 거 사줬더라?
백 예쁜 거 사줬더라?
내 보험금 받아서.
내 보험금 받아서. 아, 진짜요? 와 나 이 대목에서 확 와 닿네, 진짜.
그래서 그날 나 옥상에서
그래서 그날 나 옥상에서
밀었니?
밀었..
TEXT ON THE SCREEN
지은탁 20세
정유년 계묘월 무자일 십구시 십분 추락사
→정유년 임인월 을해일 십구시 십분 추락사
2017년 3월 2일 오후 7시 10분 추락사
→2017년 2월 17일 오후 7시 10분 추락사
지금 나한테 뭘 시킨 거예요? 이런 전개면 곤란하죠.
너 뭐야?
너 희진이랑 통화하면서 범행 모의한 거 내가 다 녹음해서 현관 신발장에 숨겨 놨어.
아니, 희진이랑 범행 모의한 거를 신발장에 숨겨 놨으면은, 그거를 갖다 경찰서에 갖다 줘서 이렇게 이렇게 해결을 해야지, 이렇게 하면 안 돼요.
너 어떻게 알았어? 너 지금 어딜 보고 얘기하는 거야?
그래, 너 그 시트콤으로 넘길 일을 왜 스릴러로 만들어? 아으, 니 남편 너무 무서워.
이렇게 대책 없이 가다가는 우리 다 죽어요.
난 이미 죽었어.
어머, 언니! 이기적인 것 봐? 그럼 나는? 나는?
너 미친년이니? 자꾸 어딜 보고 얘기하는 거야?
당신 부인, 당신이 죽인 당신 부인.
아, 너도 죽고 싶은 거구나, 하여튼 어린 년들은 조심성이 참 없어요. 저 난간으로 막 기어 올라가고, 안 그래?
아, 추락사. 내가 진짜 남친 찬스는 안 쓰려고 그랬는데, 우리 남친한테 얼마나 혼날지, 진짜 걱정된다. 어후. 후.
하아.
죄송해요.
★
가서 인간의 벌을 받아. 내 벌을 받게 되면 넌 죽는다.
제가 사람을 죽였어요, 제 아내를, 아내를 죽였어요.
미안합니다. 나는 그저 너무 말하고 싶어서, 억울하다고, 아프다고, 살려달라고, 도와 달라고 그 때 하지 못 했던 말 다 하고 싶어서..
아, 미안 하대잖아요.
너 진짜.. 너 방금 죽을 뻔했어.
알아요. 죄송해요. 언니는 얼른 좋은 데로 가세요. 전 좀 혼이 나야 될 것 같아서..
도와줘서 고마워, 들어줘서 고마워. 잘 있어 은탁아.
★
아직 화났어요? 화났겠죠? 화내겠죠?
하아.. 화 안 났어. 걱정만 했지.
근데 왜 난 혼나는 거 같지? 마음이 막 따끔 따금거려요.
나만큼은 아닐 걸? 한 시간 상간에 지옥을 몇 번을 오갔는지 모르겠다.
하아 진짜. 우리 참 불쌍하다.
아니야.
아, 진짜 그럼 불행한 건가?
아니야.
그럼 아저씨 이제 저 혼내시는 거 끝났을까요?
아니야.
대학생 되면 미팅도 많이 하고 엄청 짧은 치마만 입어야지.
아니야!
★
요새 얼굴이 헬쑥해 보이십니다. 혹시 헬스 하십니까? 이히히.
재밌냐?
너무 우울해 보이시니까 웃으시라고 한 소리지 말입니다.
안 웃겨.
왜 보자고.
아, 네 그게, 선배님 앞으로 기타 누락자 서류가 두 건이지 않습니까, 근데 한 건만 올라왔다고, 사유서 제출하시라고.. 선배님 사내 메일 확인 너무 안 하신다고..
후우, 뭘 알아야 올리지.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한 20년 됐나? 어떤 망자와 마주쳤는데, 아무 정보가 없는 망자였어.
어떤 망자인데요?
이승을 아주 오래 떠돈 듯했고, 두려움도 없어 보였어. 저승사자를 두려워하지 않는 망자는 처음 봤어. 희한했지. 물론 놓쳤고. 괜히 서류 올렸다 덤탱이 썼지 뭐. 남은 한 장은 그 망자 서류야.
★
뉴페이스야. 내가 전에 말한 그 구천 오래 떠돈 노하우 있다는.
아.. 그.
20년 전에는 저승사자 만났었다가 도망친 적도 있대.
오 진짜요? 나도 아홉 살 때 비슷한 경험..
반갑다, 네가 그 도깨비 신부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