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깨비 Episode_13
역시 나는 가장 나쁜 기억인 모양이다, 당신에게서도, 김신, 그자에게서도.
내 목소리 들리지, 나도 네 목소리가 다 들리거든, 아주 선연히(실제로 보는 것 같이 생생하게). 상장군 김신, 폐하를 뵙습니다. 구백 년 만에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내 눈을 가린 것이 구백 년의 세월인지, 신의 미움인지, 너를 지척에 두고도 못 알아 보았구나. 네가 왕여구나.
결국 내가 그 인가. 내가 왕여인가. 어리고 어리석었던 그 얼굴이 결국 나인가.
전장은 늘 지옥이었다. 그곳에서 우린 돌아왔다. 적들도 우리를 죽이지 못 했다. 그런 내 부하들이, 내 어린 누이가, 죄 없는 내 일가친척이 내 앞에서 칼을 맞고 활을 맞았다. 어명으로. 어리고 어리석은 황제가 내뱉은 그 한 마디로.
내가 그 자란 말이지. 내가 정말 왕여란 말이지.
나는 여전히 매일 매일 그 생지옥 속 일분 일초를 기억하는데 기억이 없으니 넌 편하겠구나. 구백년이 지나도.
하늘이 언제 네놈들 편을 들겠다더냐.
하늘은 여전히 네 편이구나.
하아..
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한 겁니까, 무슨 기억을 지운 겁니까, 무슨 선택을 한 겁니까, 난 대체 어디까지 비겁했던 겁니까..
★
어떻게 됐어요? 박중헌 만났어요?
만났어, 박중헌도 왕여도. 간단히 짐 챙겨 나와. 나가자.
어디로요?
유 회장 본가로 갈 거야.
네, 10분 만요.
지은탁, 너 왜 아무것도 안 물어, 넌 알고 있었어? 그자가 왕여인 거.
망자가 한 말이었어요. 의도를 모르겠어서 섣불리 전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그렇지만 내가 전하든 전하지 않든 비껴갈 운명이면 비껴가고 만나야 할 운명이면 만나질 거라고 생각했어요. 죄송해요.
짐 챙겨 나와.
당분간 여기서 지낼 거야. 입주 직원들 당분간 쉬게 해.
알았어, 근데 삼촌은 왜 여기서 지내?
이 층 게스트룸 하나씩 슬 거야. 신경 쓸 거 없어.
알았어, 근데 삼촌은 왜 여기서 지내?
전 사장님 댁으로 갈게요. 걱정돼서요. 사장님은 영문 모를 일 투성일텐데..
그래 그럼, 부탁 좀 할게. 무슨 일 생기면,
알아요. 좀 쉬세요. 덕화 오빠가 데려다 줄 거예요.
내가? 아, 뭔데? 집 왜 나왔는데? 끝방 삼촌이랑 싸웠어? 아니, 싸웠어도 그렇지 끝방 삼촌을 내쫓지, 왜 자기가 나와.
배려가 아닐까요? 저승 아저씨는 갈 곳이 없으니까..
아, 그 대목은 또 짠하네.
★
전원이 꺼져있어 음성 사서함으로 연결되며 삐 소리 후 통화료가 부과됩니다.
너는 이번 생에서도 그 멍청이를 지키는구나.
★
오라버니는 어디 있어?
집을 나왔어요. 저랑 같이.
그럼 그 사람은?
집에 있을 거 같아요.
살아는 있다는 소리네.
애초에 산 사람은 아닐 텐데..
허, 그치.
근데요 사장님 전생 기억 나신 거요, 어떻게 기억 나신 거예요?
야하게.
네?
술 한 잔 하잔 뜻이야. 소주? 맥주? 하아, 알바생, 인간에겐 네 번의 생이 있다며, 생각해 봤는데 난 네 번째 생인 것 같아.
왜요?
적어도 난 두 번의 생을 알고 있고 이번 생엔 오라버니도 만났고, 정인도 만났으니까. 너는?
저는 지금이 첫 번째 생이었으면 좋겠어요.
왜? 두 번째 생도, 세 번째 생도, 네 번째 생도 오라버니 만나게? 네가 고려 때 그 똥고집을 봤어야 하는 건데. 죽을 거 뻔히 알면서 왜 돌아오냐구, 자기나 그냥 살지.
★
아니 수도 요금을 n분의 1 하면 제가 진짜 너무 억울하죠. 아랫집 여자분 오고 나서 4천 원이나 더 나온다니까요?
아파트 전세 빼고 왔대, 가엽잖아.
그럼 저는요? 전 보증금 겨우 모아서 제 생애 처음으로 독립한 거라고요.
하긴, 첫 번째든 네 번째든 모두 소중하지, 안 그래?
뭔 소리세요. 그리고 수도가 얼어서 물이 아예 안 나온다니까요? 근데 제가 왜 n분의 1을 내냐구요!
그니까, 슬프다. 운명이. 결국 이렇게 비싼 값을 치르려나?
아, 제가 진짜 이러면 안 되는데..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현금 줘, 카드 안돼.
★
하아..
장렬히 죽었다 기별하라, 애통하다 기별할 것이니.
네가 죽는 걸 원하지 않아.
저 둘은 졸업식을 온 게 아니라 졸업식에 올 누군가를 보러 운 것 같은데.
하아.
★
장항동 김 차사 말입니다. 소문이긴 한데, 글쎄 어떤 망령의 속삭임에 죽어가던 망자의 손을 잡았던 거랍니다. 그 망령이 혹시 선배님이 놓쳤다는 그 기타 누락자가 아닌가 싶어서.. 듣고 계십니까? 선배님.
어 뭐라고?
요즘 왜 그러십니까?
기타 누락자가 뭐 어쨌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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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있었느냐, 낯빛을 보니 넌 결국 잡았구나, 그 손을. 그래 무엇을 보았느냐, 그 안에 무슨 죄가 있더냐?
그 속에 나는 없었어. 그 여자만 있었어. 그 여잔 옛날 어느 시대에 왕비였어.
그 안에 나는 있더냐, 혹 그 옆에 탕약을 건네는 손은 있더냐, 너처럼 가늘고 흰.. 그 탕약에 무엇이 든 줄 아느냐? 나의 죄가 곧 너의 죄다.
아니야,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탕약을 건네는 그 손의 주인이 바로 너다. 이 얼마나 가련한가, 가진 기억이 없으니 저를 보고도 못 알아보는구나.
아니야, 그럴 리 없어.
걱정 말거라, 내 너의 비밀은 꼭 지켜줄 터이니. 무엇보다 사사로이 능력을 쓴 것이 알려지면 곤란하지 않은가, 그러니 너의 죄도 나의 죄도 비밀로 하자꾸나.
★
역시나 네 년이 김선이었구나. 이 생에서도 넌 내 손에 죽어야겠다.
기타누락자. 구면이군, 이십 년 전에도 느꼈지만 넌 악귀로구나. 인간의 어두운 마음, 악한 기운을 빼앗아 살아 남는구나.
나야, 그저 그들의 검은 욕망에 손을 들어주었을 뿐.
악! 도둑이야! 소매치기야!
내가 눈을 가린 것인지..
선문답 집어 치워라. 이름이 무엇이냐?
헛수고 말아라. 내 이름을 안다고 해도 넌 나를 어쩌지 못한다. 그러니 내가 구백 년을 살아온 것 아니겠느냐.
수작 부리지 말고 이름을 대라.
네 이름이 무엇인지는 알고 묻는 것이냐? 내 알려주랴? 넌 여전히 미천한 것을 쥐고 있구나. 소중해 꼭 쥔 걸 보니 이 생에서도 반드시 죽겠구나.
나를 아는 자인가..
★
네가 웃을 줄 알았지.
네가 웃을 줄 알았지. 하하 웃으면 안 되는데.. 아, 웃으면 안 되는데.
TEXT ON THE SCREEN
끝방삼촌
여보세요. 덕화야 난데..
여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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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생겼어요.
이 검을 왕이 내렸단 말이지. 넌 아무것도 묻지 않는 걸로 도깨비 그 자 편을 들고 있구나. 미안한데 한 번만 내 편 들어주면 안 될까?
뭔데요?
이것 좀 써니 씨한테 전해줘. 이런 핑계조차 없어야 할 것 같아서, 나한테.
그럴게요.
나를 기억하지 못 할 거야. 반지는 네가 좀 얼버무려 줘. 간다.
기억.. 하시는 거 같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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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기다리세요? 임금님?
이젠 못 기다리지.
왜요? 전생이 다 기억나서요?
임금님을 사랑한 그 여인은 대역죄인의 누이이니까. 그래서 그 사람 손에 죽었네. 자꾸 헷갈린다. 갈가리 찢기던 심장의 고통을 느끼는 게 나인지, 아니면 전생의 나인지. 그도 슬펐을까? 나는 등 돌린 뒷모습만 봤네.. 행복했던 순간만 간직하랬는데 난 그 조차도 다 좋았나 봐. 이렇게 다 기억하는 걸 보면.
★
그 사람은요? 만났어요? 지난 일이에요. 지나도 한참 지났죠. 생을 넘어 지난 일이니.
너는 전생이지만, 난 여전히 현생이다. 그 생을 살고 있거든. 나는 물러설 데가 없으니 나아가는 것 밖에 할 수 없다. 그자는 널 죽였고.
날 죽인 게 아니라 김선을 죽였죠, 내가 아니라. 난 써니예요. 나의 생은 이 생이에요. 하아, 하지만 오라버니께서 나아가지겠다면 생을 건너서도 여전히 제 대답은 그때와 같습니다. 가세요. 오라버니.
이번에 내가 나아가면 내가 여에게 하려는 것이 용서는 아닐 것이다.
제 걱정은 마세요. 이번 생에선 정말로 행복해 질게요, 오라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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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검을 가슴에 꽂고 구백 년을 살았구나, 그 자는.
★
저승부 감사팀이다. 앉아라.
그대는 차사직을 수행함에 있어 사사로이 능력을 쓴 사실이 확인 되었다. 인간의 기억을 지운 것 외에 명부를 발설한 것, 존재를 들키고도 조치하지 않은 것, 인간에게 전생을 돌려준 것 등.
둘이 싸운 거다. 너흰 아무것도 보지 못 했다.
먼저 갈게, 라고 해.
먼저 갈게요.
먼저 갈게.
잠깐 제 눈을 좀 봐주시겠어요?
미안한데, 제 눈을 좀 보시겠어요?
기타 누락자의 명부가 왔어.
명부가 왔어.
기타 누락자.
말하지 않은 게 있어. 써니 씨 전생 본 거 말이야.
비밀이라며.
네 여동생의 환생인 것 같다.
저는 저승사자입니다.
모두 인정하는가?
인정합니다.
본인도 인정한 바, 이에 중징계를 내리니 사안의 엄중함을 직시하라.
달게 받겠습니다.
결코 달지 않을 것이다. 저승사자는 생에 큰 죄를 지은 자들로 기백년의 지옥을 거치며 스스로 기억을 지우는 선택을 한 자들이다. 허니, 다시 너의 죄와 대면하라. 이것이 이 모든 규율 위반의 엄중한 벌이다.
★
역모의 무리를 멸하시고 강건함을 보이시니 흉흉하던 백성들의 잠이 모처럼 단정하여 저잣거리에 폐하의 칭송이 자자합니다. 혹 구중의 깔끄러우실까 염려되어 식전주를 내라 일렀습니다. 향이 아름답고 단맛과 신맛이 어우러져 구미가 돌고..
폐하의 심신이 미령하여 만백성이 근심이다. 명일부터 수라를 줄이고 탕약을 들이라.
입에 써도 드시옵고 옥체와 정신을 맑게 하시어 강건함을..
이정도 강건함이면 되시겠소?
어느 날엔간 혹여 찾으실까 하여..
★
이 고운 비단 옷, 누구에게 입힐고.. 이 아름다운 옥 반지, 누구 손에 끼울고.. 이 고운 비단 옷, 누구에게 입힐고.. 이 아름다운 옥 반지, 누구 손에 끼울고..
그 아름다운 옥 반지, 내게 주시오. 그 아름다운 옥 반지 내게 주시오. 훗날 쓰일 데가 있을 터이니.
갖고프냐, 그래. 그럼 주마, 가지거라.
이 고운 옷은 주인이 없구나. 혹여 그대가 찾는 것인가.. 그럼 가져가라.
★
폐하, 탕약을..
내 백성들도, 내 신하들도, 내 여인도.. 나조차도 나를, 그 누구도 나를 사랑하지 않았구나. 끝끝내 나는 그 누구에게도 사랑 받지 못하였다. 탕약을 더 가져오라. 무엇이 들어 있는 줄 안다.
예?
한 번에 끝내자꾸나. 탕약을 더 가져오라. 어명이다.
★
그대는 지금 이승에서의 죄와, 그 죄 속에 가장 큰 죄인 스스로 목숨을 끊은 죄와, 사후 육백 년의 지옥을 다 돌려 받았다.
아.. 하아..
하여 차사직 수행은 정지되며 추후 지시가 있을 때까지 대기한다.
내가 왕여였구나, 내가 저들을 다 죽였구나. 나를 죽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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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들 생각은 어떠한가, 나는 어찌해야 할까, 그 자를 어찌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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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 다시 손 대지 마. 넌 이 그림 보고 울 자격 없어.
내가, 검을 내렸어. 너에게. 내가 죽였어, 내가 다 죽였어. 기억이 났어. 내가 왕여였어.
그래 너라니까. 네가 그랬어. 네가 다 죽였어. 죽이다 죽이다 너는 너까지 죽였어. 너는 네 여인도, 네 충신도, 네 고려도, 너조차도 단 하나도 지키지 못했어. 선이가, 그 어린 누이가 목숨으로 지킨 너였어. 넌 살았어야 했어. 끝까지 살아 남아서 내 칼에 죽었어야 했어. 그래서 네가 내게 씌운 역모라는 그 죄를 넌 죽음으로 증명했어야 했다. 누이는 알았을 거야. 박중헌 입에서 김신이 나왔을 때 그 다음은 김선이 나올 거라는 걸. 너를 옥죌 빌미가 될 거라는 걸. 그래서 그 못난이는 너에게 약점이 되느니 그 자리에서 역적의 누이로 죽어간 거, 너 살리려고.
반지, 내가 그 반지를 그렇게 못되게 끼웠어. 그녀의 손에. 그 반지가 이번 생에도 오갔어. 부탁이야, 네가 나 좀 죽여줘.
하아. 역시 그래? 이번에도 널 버리게? 너를 죽인 죄는 네가 지은 걸로 충분한 것 같다.
★
고민 많이 해봤어요. 이걸 전해 드리는 게 맞는지. 그래서 며칠 갖고 있었어요. 죄송해요.
네가 왜, 내가 미안하지.
더 안 물어보세요?
뭘 물어, 다 알겠는데. 이걸 이렇게 받을 줄은 몰랐지만. 누군가의 한, 죄, 그리움이 다 내 거였어? 허, 그 무당 용하네. 근데 너는 무슨 죄니?
네?
네가 도깨비 오라버니 신부라며. 나랑 그 사람이야 전생의 연에 얽혔다 쳐. 넌 왜 오라버니와 얽힌 거야?
그럴 운명이어서요.
너도 뭐, 이상한 거 해? 혹시 너도 막 나니? 새처럼?
전 그런 건 아니에요.
도깨비의 불멸을 끝낼 소멸의 도구, 그게 도깨비 신부의 운명이야. 네가 검을 빼면 그자는 먼지로, 바람으로 흩어질 거야. 이 세상 혹은 다른 세상 어딘가로 영영.
알바생?
아, 네. 전 그냥 비를 좀 덜 오게 할 수 있어요. 시민들 불편하지 않게. 첫눈이 좀 일찍 내리게 할 수도 있어요, 세상 사람들 신나게.
제일 중요한 일 하네. 근데 오라버니는 왜 도깨비가 된 거야?
세상엔 기적이 필요하니까요. 이상하고 아름다운.
누가 그래?
제가요.
그래, 그럼 저승사자는? 사람은 누구나 죽으니까?
죽음이 있어 삶이 찬란하니까요.
말 잘하는 것 봐. 역시 명문대생!
오랜만이다, 천한 무신의 누이. 미천한 무신 가문의 황후.
왜, 거기 뭐 있어?
넌 빠지거라. 아직 순서가 아니다. 넌 저년 다음이다.
가까이 오지 마.
사장님, 제 코트에서 라이터 좀요. 빨리요!
라이터? 라이터는 왜?
여는 내 아들이나 진배 없었다. 저년이 다 망쳤다. 죽일 것이다.
사장님 빨리요!
알았어!
네 이년!
알바생, 왜 그래! 뭐야! 뭔데, 정신 차려봐! 알바생!
★
괜찮아, 걸을 수 있겠어?
네 괜찮아요. 놀라셨죠?
그럼 놀랬지, 너 아까 누구랑 얘기한 거야? 그 시퍼런 거? 빛 같은 그거 뭐야? 너 사람이라며. 혹시 사람인 듯 사람 아닌 사람 같은 너야?
아하하, 저도 처음 있는 일이라.. 사장님 먼저 들어가세요. 저는 사장님 오라버니 좀 만나고 들어갈게요.
오기로 했어?
제가 부르면 안 올 수가 없거든요.
★
후.
잘 지냈어?
보고 싶었어요.
나두.
잘 지냈어요?
응, 미안해. 금방 데리러 올게. 너 목에 낙인이..
왜요?
거의 안 보여.
그래요? 왜지?
이게 이만큼 흐려졌다는 건 내가 그만큼 널 위험하게 했다는 거고, 앞으로 내가 널 못 느낄지도 모른다는 거고.
걱정 마세요. 더 주의하고 더 조심할게요.
혹시 그자 또 마주쳤어? 박중헌?
그렇긴 한데, 내가 목적이 아니었어요. 사장님이 목적이었어요.
그것도 네가 걱정할 거 아니야. 넌 네 걱정만 해. 누이는 다른 자가 지킬 거니까. 딱 이틀만.
운명은 내가 던진 질문이다. 답은 그대들이 찾아라.
질문을 받았고 나와 저승 그 자는 그 답을 찾아야 돼.
★
TEXT ON THE SCREEN
기타 누락자
대상자
박중헌
누락 내용
망자는 정축년 신사월 기묘일에 사망하였다.
그 후 사자의 부름에 응하지 않고 도주하였다.
정축년 계묘월 병자일에 망자를 우연히 마주쳤으나
또 다시 도주를 행해 추포하지 못 하였다.
★
무슨 일이십니까?
전에 말한 기타 누락자 서류야.
이십 년 전에 놓쳤다던 그 망자 말씀이십니까?
어, 근데 나는 대기 중이라 처리할 수가 없어. 네가 해야 돼. 그러니까 지금부터 내 말 잘 들어.
말씀하십시오.
구백 년간 떠돈 망령이고 인간들의 어두운 감정에 기생해 지금까지 살아 남았어. 마주친다 한 들 우리 힘으론 힘들어. 근데 명부에 이름 올리면 일단 제어는 가능할 것 같아서. 빠른 처리 부탁해. 급한 건이라. 내일 정오가진..
오늘 자정 전이요.
고맙다.
저도 말씀 드릴게 있습니다. 아셔야 할 것 같아서요. 제가 선배님 관할구역 이관 받아서 하고 있는데 명부 중에 지은탁이라고.. 이분 그 때 그 도깨비 신부님 아닙니까? 날짜를 보니까..
발설하지 마. 명부에서 손 떼. 내가 본 거야. 넌 모르는 거야.
TEXT ON THE SCREEN
지은탁
이십세
정유년 계묘월 경자일 이십시 삼십오분 심장마비
2017년 3월 14일 오후 8시 35분 심장마비
일주일 후네.
★
아직 순서가 아니다, 넌 저년 다음이다.
결국 날 노린다는 건가?
★
TEXT ON THE SCREEN
劉信遇 유신우
은탁이의 명부가 왔어. 아무래도 박중헌과 관련된 거겠지.
정유년 계묘월..
이제 그 날짜는 의미가 없어. 알 텐데.
그래도 알면 좋을 듯 하여..
박중헌이 누이 주변을 맴돌아. 지켜, 단 한 번이라도 내 누이를 지켜. 내 누이가 널 지켰듯이.
그날.
황제에게 가는 길은 너무 멀었고 나는 결국 닿지 못했어. 닿지 못할 걸 알면서도 다 알면서도 나는 나아가는 것 밖에 할 수가 없었어.
그날 넌 무엇을 위해 앞으로 나아갔던 거야? 그 자리가 무덤이 될 걸 다 알면서..
전하지 못 했던 말을 전하러. 검을 받고 수없이 뵙기를 청하였으나 황제이자 매제인 네 놈은 변방으로 떠나란 교지만 전해왔지. 내가 죽는 걸 확신한 그날에서야 넌 얼굴을 보였어.
그래서 그렇게까지 해서 무슨 말을..
선황께선
돌보지 않음으로 돌보았다 전하라.
널 돌보지 않음으로 돌보았다고, 너의 이복형이었던 선황제에게, 너의 정인이었던 내 누이에게, 너의 고려를 지켰던 나에게 넌 사랑 받았다고, 그러니 한 말씀만 내리라고. 분노와 염려를 담아 검을 내릴 테니, 박중헌을 베어라, 그 한 말씀만. 그 검이 내 가슴에 꽂힐지는 몰랐던 거지. 어떻게 이런..
너나 나나 구백 년의 세월이다. 그깟 물의 검으론 나를 못 벤다.
이리 멀리까지 와 보아도 결국 이 검을 쥐게 되는구나.
무슨 일이야, 또 검이 아파?
이 검의 효용가치는 결국 그거였어. 박중헌을 베는 것.
★
이과예요? 전화번호의 완성은 립이죠!
하아 미친다, 진짜. 예쁘게 보여야 돼, 그만 울어.
★
왜 자꾸 따라다녀요? 벌써 며칠 됐잖아요. 스토커예요?
그런 거 아닙니다. 길이 우연히 겹친 것 같은데..
덕분에 데이트하는 기분이었네요, 나는. 김우빈 씨랑.
대체 왜.. 어떻게 기억을..
당신이 최면을 잘못 걸었으니까?
힘들도, 슬픈 순간들은 다 잊어요. 전생이든 현생이든 그리고 나도 잊어요. 당신만은 이렇게라도 해피엔딩이기를..
행복했던 순간들만 남기래 놓고, 당신을 잊으라니.. 순서가 안 맞지. 당신이 있는 모든 순간이, 슬프고 힘들었던 것조차 다.. 그 조차도 나는 다 좋았네요. 그래서 내가 죽음으로써 당신을 지킨 게 당신에게 해피엔딩이 되었나요? 지금 모습이 그렇게 젊은 걸 보니 오래 살지 못했군요.
매일이 사무치게 그리워서..
그럴 걸 뭐 하러..
어리석어서..
빨리 좀 깨닫지, 근데 난 어떻게 이번 생에서조차 당신에게 반했지? 성안이 훤하셔서 그런가? 자요, 진짜 헤어져요 우리. 이번 생에는 안 반할래. 내가 당신한테 줄 수 있는 벌이 이것 밖에 없어. 굿바이, 폐하.
★
줘!
돈도 없으면서 과자는 어디서 났냐? 훔쳤냐?
아니야, 할머니가 사줬어.
구걸해서 받은 거 아니야?
우리 할머니 욕하지 마! 장풍!
얘, 또 이런다. 참나.
야, 장풍 그렇게 하는 거 아니야. 이렇게 하는 거지. 장풍!
아아..
야, 이놈들이 또!
장풍!
뭐야..
진, 진짜였어?
괜찮아?
누나, 어떻게 알았어요? 진짜 장풍 쏠 거라고, 전에 나한테. 나 진짜 쐈어요, 장풍!
누나도 네 나이 때 나중에 크면 도깨비 신부가 되어야지 했는데 진짜 도깨비 신부가 됐어. 그치만 비밀이다. 장풍 이런 거 너무 위험해서 아무 데나 막 쏘면 안돼. 알겠지?
할머니한테만 말 할게요.
오, 좀 멋진데?
멋지면 여행 가자.
헐.
왜?
나 지금 심쿵함.
잘 됐네, 심쿵을 지향한다며.
기분이 좋아 보이네요? 그럽시다, 막 여행 가고 그래버립시다!
★
아저씨!
좋다.
선물 있어.
난 충분한데, 지금도 넘치게 완벽한데.
아닐 걸?
어? 이거!
이제 어른 됐으니까 기억해 둬. 이런 건 원래 하나씩 나눠 갖는 거야.
그래서 제가 딱 위조를 했던 거죠. 아, 근데 그때 들켜가지고.. 근데 뭐가 원본이에요? 그거구나?
으음!
그거 나 줘요.
싫은데?
아, 그거 나 가질래!
★
TEXT ON THE SCREEN
1. 을은 갑의 남친이 생길 때까지 남친이 되어준다. 갑은 심쿵을 지향한다.
1. 을은 갑의 등잔이 돼주기로 한 것을 나 몰라라 하지 않는다. 갑이 자연사 할 때까지.
1. 을은 갑에게 오면 온다 소린 안 해도 가면 간다 기별을 해 준다. 갑이 기다리지 않게.
1. 을은 매년 첫눈 오는 날에 갑의 소환에 응한다. 갑이 기다릴 것이기 때문이다.
을은 매년 첫눈 오는 날에 갑의 소환에 응한다. 갑이 기다릴 것이기 때문이다.
대박! 눈이 와요. 첫눈이에요 아저씨!
난 뭐 천년이나 슬퍼?
난 뭐 맨날 아프나?
난 내 운명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씩씩하게 사는 당찬 도깨비야.
전 지금 겸허히 운명을 받아들이고 씩씩하게 사는 당찬 도깨비 신부라고요.
천년만년 가는 슬픔이 어디 있겠어, 천년만년 가는 사랑이 어디 있고.
난 있다에 한 표.
어느 쪽에 걸 건데? 슬픔이야, 사랑이야?
그런 허락 같은 핑계가 생겼으면 좋겠어. 그 핑계로 내가 계속 살아있었으면 좋겠어. 너와 같이.
슬픈 사랑?
★
유덕화 씨!
아, 카드! 내 카드!
잘 주무셨어요? 여기는 집이 아니라 직장입니다. 제발 작심 하루라도 갑시다.
죄송합니다. 어, 어서 오세요, 손님! 아우, 침대 보러 오셨구나, 크으, 또 안목이 좋으시네, 이 침대가 말이죠 이렇게 누워 보면은 바로 또 이렇게 잠이 또 솔솔..
유덕화 씨. 유덕화 씨!
많이 보고 싶을게다.
★
음료 나왔습니다. 어서 오세요, 이쪽으로 앉으세요.
평안해 보이니, 건강해 보이니, 그럼 되었다. 이 생의 너로 잘 살거라.
★
오, 이젠 막 생각만 해도 앞에 있어. 나 방금 김신 씨 생각했는데 어쩐 일이에요?
보고 싶었고, 부탁도 있고..
하세요.
박중헌과 관련된 일이야.
아, 안 그래도 생각을 해봤는데 궁금하더라구요. 왜 하필 지금일까, 구백 년을 떠돌았는데 왜 지금 나타난 걸까, 하고.
응 그것 때문에.
아주 잠깐 용감해져야 돼. 할 수 있겠어?
난 도깨비 신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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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들어. 내가 잠시 후에 전화를 할 거야. 그럼 넌 날 즉시 소환해.
껌이죠.
갔다 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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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말하지 않았느냐, 물로 만든 검 따위로 날 못 벤다고.
알고 있어. 그러니 이제 우리의 마지막 전장으로 가볼까?
내가 어디로 갈 줄 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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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메밀꽃은 꽃말이 뭘까요?
연인.
역시 넌 이제 내가 보이지 않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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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 ON THE SCREEN
지은탁
20세
2017년 3월 14일 8시 35분 심장마비
→2017년 3월 11일 18시 47분 심장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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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때문이구나, 내 낙인이 흐려지길 기다린 거구나.
제법이구나, 허나 늦었다.
나를 이용해 아저씨 검을 뽑을 생각이구나.
지금이야, 나 소환해.
원망 마라. 이게 네 운명이니..
후
괜찮아? 지은탁!
나 알았어요, 지금 나타난 이유 알았어요. 나 베요! 나 빨리! 내 몸에 들어오면 끝이에요. 내 손을 빌어서 아저씨 검을 빼려는 거예요. 난 어차피 아저씨 아니었으면 죽을 운명이었어요. 얼른 나 베요! 빨리요!
이 아이 말이 옳았다. 베었어야지, 이제 네가 죽거나 내가 죽거나인데 넌 자꾸 뒤돌아 보느라 내 손에 죽겠구나.
박중헌, 망자는 사자의 부름에 답하라.
네놈이..
박중헌. 박중헌!!
이리 가는구나. 허나 허망하지 않다. 나는 네놈을 또 죽였으니, 보아라. 결국 파국이다.
용서하십시오. 장렬히 죽는다 이제야 기별합니다.
안돼! 안돼, 안돼, 안돼, 안돼!
널 만난 내 생은 상이었다.
싫어요, 제발. 내 손 안 놓겠다고 했잖아, 약속 했잖아.
비로 올게. 첫눈으로 올게. 그것만 할 수 있게 해달라고 신께 빌어볼게.
그러지 마, 그렇게 가지 마. 나 당신 사랑해, 나 당신 사랑해요, 사랑해.
나두, 사랑한다. 그것까지 이미 하였다.
안돼.
결국 난 그 선택을 했구나.
이제야 알겠습니다.